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김동현/ 성결대 음대 교수]


“김동현씨, 합격입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합니다.”

“네, 네... 네?”


나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노래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원하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는데 그냥 멍할 뿐이었다. 그리고 무지하게 기. 뻤. 다.

내 평생 소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래하며 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직장을 갖는 것. 한쪽 팔을 들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나로서는 두 가지 다 이루기 어려운 소원이었다. 하지만 나는 1992년 10월 9일 내가 꼭 서른 살이 되던 날, 이역만리 독일 땅, 그것도 세계최고수준이라는 국립베를린도이체오페라단 오디션 장에서 두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


걸음마도 하기 전에 불의의 사고…오른팔 못써

나는 생후 10개월이 되던 1963년 여름,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에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한 여름이어서 문을 떼어 벽에 세워 두었는데 내가 기어가서 건드리는 바람에 문이 넘어졌다고 한다. 문이 어깨에 떨어진 날 저녁때 이후로 나는 작은 물건도 오른팔로는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한창 뛰어 놀아야 할 소년 시기에도 팔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를 어머니께서는 늘 걱정하셨다. 천성이 순하고 소심한데다가 장애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안쓰러우셨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장애와 소심함 외에 묘한 ‘근성’ 같은 것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자전거나 스케이트 같은 운동을 못하게 말리셨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가도 말리는 것일수록 더욱 하고 싶어지곤 했다. 자전거도 스케이트도 결국엔 타고야 말았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음악을 만났다. 모태 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녔고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졌다. 운동과 달리 음악은 신체 능력이 그다지 필요 없었고 정서순화에 도움이 된다며 어머니께서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후원해 주셨다. 나는 학교와 교회를 오가며 열심히 합창반 활동을 했고, 고교시절 합창반을 지도해 주신 김명엽 선생님(전 대광고 음악교사, 현 울산시립합창단 지휘자)을 만나면서 음악가의 꿈도 꾸게 되었다.


▲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팔은 불편했지만 좋아하는 운동은 꼭 배우고 마는 ‘근성 있는’ 개구쟁이였다. (왼쪽에서 4번째)

음대 성악과를 가려면 피아노를 반드시 칠 줄 알아야 했다. 초등학생도 꾸준히 연습하면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가 오른팔을 들 수 없는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들리지 않는 오른팔로 피아노 연습


무척 절망스러웠지만 다행히 나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어서 고3때부터 피아노를 완전히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역시 문제는 팔이 들리지 않는 것이었는데 나는 여러 가지로 꾀를 내었다. 처음에는 일어서서, 다음에는 등받이 의자에 팔을 올려놓고, 나중에는 다리를 꼰 약간 건방진(?) 자세로 피아노를 연습했다. 이렇게 하루 8~9시간씩 손가락과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연습한 결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1981년 3월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음악가로서의 삶에 발판을 마련했다는 기쁨에 학교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벚꽃이 아름답게 흩날리던 그해 4월, 나는 기관지염으로 무척 아팠다. 숨 쉬기가 힘들만큼 기침이 나고 목소리도 전혀 안 나와서 병원을 찾았다. 그때 나를 진찰했던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동현씨! 지금 기관지염 자체는 심각한 상태가 아니지만, 동현씨는 팔이 불편한 문제 때문에 성악을 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인 것 같아요. 건강에도 좋지 않구요. 성악을 하지 말고 다른 학문을 전공하는 게 어때요? 진지하게 고려해 보세요.”


의사선생님의 진심 어린 말씀을 듣고 내가 어렵게 선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다시는 그 병원을 가지 않았다. 아무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도 나는 여전히 노래가 좋았으며 꼭 음악을 하고 싶었다. 안 될 때 안 되고, 후회할 때 후회하더라도 일단은 해 보고 실패든 후회든 하자는 생각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다가 교회음악에서 필수인 ‘지휘’를 할 수 없어서 중도에 포기하고 독일로 유학을 가고자 마음먹었다. 독일은 모든 대학이 국립이고 외국인에게도 학비를 받지 않아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유학을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국가어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당시 을지로 입구 학원 새벽반에서 문법, 독해 등을 공부하고, 남산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독일문화원에서 독일어 강좌를 들었고 노래 연습도 밤낮 없이 계속했다. 이때는 비행기만 보면 울먹이며 기도했다. ‘저 노래하고 살게 해 주세요, 욕심 없이 살게요, 저는 팔도 불편하니까 다른 일 하기도 힘든데 30살쯤 되면 노래해서 돈도 벌게 해주세요.’


치열한 경쟁·장애·동양인…‘3중 장벽’ 넘어 독일 음악대학원 입학


우여곡절 끝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쾰른국립음악대학 대학원을 목표로 준비를 했다. 경쟁률은 무려 40대 1이었다. 나는 외국인이자 동양인, 그리고 음악하기에 불리한 장애를 가지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음악 수재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했다. 방법은 오로지 연습밖에 없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고,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7개월만인 1988년 봄 쾰른국립음악대학 대학원에 당당히 입학했다. 그리고 쾰른 음악대학에서 에다 모저(Edda Moser) 교수를 사사했다. 이 분은 내가 음악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엄청난 것들을 모두 전수해 주신 분이다.


▲ 2006년 희망콘서트에서 두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와 함께 열창하고 있는 김동현 교수


유학 생활은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어느 날 내 생일에 친구들이 자전거를 선물했다. 그 친구들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아는 나는 그걸 어디에서 구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들은 자전거를 산 것은 아니고 라인 강변에 팽개쳐져 있던 고물 자전거를 ‘주워 왔다’고 했다. 절도를 할 수는 없었기에 며칠 밤낮 동안 교대로 망을 보면서 주인 없는 자전거임을 확인한 후 자전거 수리점에 들러서 수리를 한 후 가져 왔다고 말했다. 당시 돈으로 10마르크(5천원 상당)를 들여서 고쳐 왔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로서는 정말 눈물겨운 우정의 선물이었다.


1992년 대학원을 졸업한 후 나는 오페라 단원이 되고자 오디션을 준비했다. 독일 오페라단의 오디션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경쟁률이 높지만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오페라단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한 목소리의 소유자가 나타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오디션을 보더라도 오페라단에 적합한 목소리가 나타나면 더 이상의 경쟁 없이 발탁된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오페라단 시험을 준비했지만 함부르크와 슈트트가르트에서 각각 한 번씩 낙방을 경험했다. 그리고 결국 베를린의 오디션에서 합격을 했다. “김동현씨,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합니다.” 내 목소리가 오페라단에 적합한 단 하나의 목소리로 선택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독일에 와서까지 마음속으로 수 없이 되 뇌였던 두 가지 기도가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내가 활동할 당시 베를린도이체오페라단에는 나를 포함하여 20여 나라에서 온 1,000여 명의 직원이 있었다.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오페라단 안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평등이나 불편함을 겪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팔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일 년에 받을 수 있는 휴일이 7주에서 8주로 늘어났고 각종 세금혜택에다 팔에 무리가 올만한 일들은 거절할 수 있는 권리까지 얻는 등 장애인을 배려하는 독일 사회의 시스템의 혜택을 많이 입었다. 그리고 오페라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동료들과의 화합이었는데 다행히 내 곁에는 훌륭한 동료들이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한국선 상상하기 힘든 독일의 장애인 복지 시스템 큰 도움


만약 내가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특히 동남아시아 등 제 3세계국가 출신의 외국인)이라면 독일에서 받은 것과 같은 포괄적이고 제도적인 배려를 받을 수 있을까? 솔직히 상상조차 어렵다. 장애인을 포함한 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사회적 배려는 OECD에 가입한다고 자동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년 동안 오페라단에서 활동한 나는 1998년 귀국했고 현재는 성결대학교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독일국립오페라단원이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활동 자체만으로도 큰 명예이며 그만큼 경제적인 보상도 뒤따르는 일이다. 내가 떠나온 지 10년이 되었는데 최근에서야 내 목소리의 자리가 메워졌을 만큼 나에게 맞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라로 돌아왔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배운 것들을 내 조국으로 돌아와 풀어내고 펼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김 교수는 자신의 희망인 음악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는 과정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말한다


학생들을 만나서 내가 여러 선생님들에게 배운 지식과 사랑을 나누는 삶은 무척 즐겁다. 반면 의외로 어렵고 힘든 점도 있는데 음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상과 현실의 간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명문 음대를 졸업해도 프로 음악가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음악가로 자리매김하여 좋은 음악회에 출연하거나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늘 꿈과 이상을 높게 가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자주 현실을 이야기 하게 된다.


그렇다.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듯이 꿈만 가지고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꿈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안 될 때 안 되고, 후회할 때 후회하더라도 일단은 해 보고 실패든 후회든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끝끝내 안 될 수도 있지만 될 수도 있으니까. 내 경우에도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과 꿈이었다.

“불편한 나의 몸은 내 마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

노래 안에서 나는 처음부터 구름처럼 가벼웠고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음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나는 노래 속에서만큼 자유롭지 못했다. 팔을 들 수 없는 성악가, 비뚤어진 자세로 노래하는 성악가는 ‘네모난 세모’처럼 말이 안 된다, 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내 팔을, 내 몸을 바라보는 청중이 의식되어 마음 놓고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을 향한 나의 열망과 꿈은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노래를 처음 만났던 때처럼 온 마음으로 음들을 껴안고 리듬을 타게 되었다. 이제 불편한 나의 몸은 내 마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 무대에서 노래할 때 여전히 내 몸은 비뚫어져 있고 팔은 들 수 없어서 말 할 수 없이 불편하지만 청중과 교감하는 내 마음은 참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노래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오늘도 나를 설레게 한다.

앞으로 내가 만날 제자들이 꿈과 열정을 기초로 미래를, 노력을 기반으로 어두운 현실 속을 한 걸음씩 걸어가길 기대한다. 내가 걸어왔던 것처럼.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동현 교수는 서울대학교 음대, 독일쾰른음대를 거쳐 1993년부터 6년간 독일베를린도이체오페라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성결대학교 음대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팔을 들 수 없는 2급 지체장애를 가졌지만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성실한 태도를 바탕으로 정상급 음악가가 되어 독일가곡의 깊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는 이희아, 박마루 등과 함께 자원봉사로 ‘희망으로 콘서트’에 적극 참여해 왔으며, 2007년에는 선행칭찬운동본부가 주최하는 2007 칭찬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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