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도 이루소서

1948년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배재학당의 주전 아이스하키 선수가 각혈을 시작했다. 이때 나이 18세. 폐결핵 3기였다. 피를 한 바가지씩 쏟았지만 약이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건강했던 그의 몸과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 후로 무려 10년을 골방에 누워 신음하며 하느님과 대면했다. 육신을 일으켜주시면 당신을 위해 살겠다고 기도했다.



정태영

푸르메재단 기획팀장


올해 팔순을 맞은 푸르메재단 이사장 김성수 성공회 주교의 이야기다. 그가 이제 서울을 떠나 고향 강화도로 돌아간다. 초등학교 입학하며 시작된 서울살이 70여년 만이다. 장년이 되어서 건강을 되찾은 그가 사제서품을 받은 게 1964년이니 성직자 생활만 올해로 45년이다. 삶을 얻은 김성수 주교는 하느님과 ‘약속’대로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신학교 시절 탄광촌과 영산강 간척사업 현장에 위장취업을 했다. 지하 수백 미터 찌는 더위와 암흑 속에서 꽁보리밥을 먹으며 가난의 굴레를 똑똑히 지켜봤다. 군사정권하에서는 반독재 운동의 선봉이었던 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이끌었고 6·10항쟁의 복판에서 하느님의 의로운 세상을 열망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산과 같은 인물이지만 곁에서 바라본 김성수 주교는 한없이 겸손하고 소탈한 분이다. 8년 동안 총장으로 재직하며 진보적 학문의 요람으로 키워냈던 성공회대학교를 지난해 떠나면서 이임식마저 고사했다. 손자 같은 학생들에게 점심을 사고 가난한 학생에게는 등록금을 대주었던 ‘총장 할아버지’로만 기억되고 싶다면서.


 퇴임 직후 몰려드는 인터뷰 요청도 한사코 뿌리쳤다. 주변에서 자서전 이야기가 나오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며 펄쩍 뛰신다. 자신을 낮추는 일은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문턱에서 겪은 절절한 영적 만남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믿음의 증거라고는 새벽마다 십자가 앞에 꿇어앉아 깊게 파인 방석뿐, 진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그저 쉼 없이 걸어왔다고만 말씀하신다.


 푸근한 고향마을 할아버지 같으면서도 시대를 통찰하는 눈은 여전히 날카롭다. 최근 촛불시위 현장을 목격하시고는 “집회의 자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찰버스가 아니라 이동식 화장실”이라고 통탄하셨다. 신은 인간 세상을 알록달록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한쪽이 억지로 다른 한쪽을 누르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다양성, 공존에 대한 김성수 주교의 철학은 정치현실에 대한 지적에서도 드러난다. 김성수 주교는 우리 정치가 바다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바다는 강물의 맑고 흐림을 가리지 않는다. 대동(大同)과 상생(相生)의 정치문화가 아쉽다는 것이다.


 다음달이면 서울을 뒤로하고 고향 강화도로 돌아가는 그는 장애인들을 위한 ‘원장 할아버지’로 살며 그들과 함께 콩나물을 길러 팔겠다고 한다. 그들이 마음껏 치료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푸르메재활병원도 구상하고 계시다. 김 주교의 장애인 사랑은 평생에 걸친 것이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장애와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김성수 주교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문이다. 기도를 이루는 방법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힘없고 불편한 사람들이 행복하면 누구나 행복한 세상이다. 김성수 주교의 일생은 마음이 메마른 모든 이에게 샘물처럼 다가갈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김성수 주교의 삶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모르겠다.


글=정태영 푸르메재단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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