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내게로 왔다.

시드니는 이번 주 들어 내내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당신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신록의 쿠링가이 숲 사이로 안개비가 자욱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한국에 많은 눈이 왔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감이 잡히지 않네요.


얼마 전 저는 슈퍼마켓 앞에서 아내의 장보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계산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꽁지머리를 한 금발의 백인 청년 점원 앞으로 한 아시아계 여성이 다가서서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고 신용카드로 물건 값을 결제하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꽁지머리 백인점원은 손님의 카드를 긁은 후 손에서 손으로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계산대에 휙 하니 던져 놓았습니다. 이런 모멸적인 행동에 대해 그 아시아계, 겉모습으로는 중국이거나 한국 아니면 일본계였을 것 같은 그 여성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그저 눈을 치켜뜨고 째려보는 것으로만 항변하더군요.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기 싫으니 네가 알아서 집어가라는 인종모욕적인 행동을 한 이 싸가지 없는 녀석의 싸가지 없는 행동에 대해 그 여성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목격한 저 역시 이제는 슈퍼마켓 같은데서 카운터로 가기 전에 우선 캐시어의 인상부터 확인한 후 골라서 줄을 서는 습관이 붙었으니 그 당사자는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는 그런 인종적 편견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평생 호주나 호주인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케이스를 경험한 또 다른 여인은 호주인들에 대해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을까요. 그 분은 한국에서 언어 연수차 호주에 왔는데 처음 호주에 도착한 곳이 서부호주의 한 작은 마을이었다고 하네요. 시드니처럼 교민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도 아니었고 서울을 떠나올 때 그 분이 지니고 있었던 답답한 심정이라든가 앞으로 그 낯선 곳에서 살아갈 생각 때문에 무척 외롭고 쓸쓸해서 서울에 두고 온 친척한테 전화나 걸려고 바깥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떠나올 당시 휴대폰도 준비해지 못했지만 한국처럼 문밖을 나가면 공중전화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나갔는데 아무리 헤매도 공중전화는커녕 지나가는 행인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 겨울이라 해는 짧아 사방은 점점 어두워지고 한편으로는 떠나온 게 자꾸 후회스럽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해서 눈물이 나왔다고 하네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과 옷깃으로 훔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마침 정원에서 화초에 물을 주고 있던 호주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사연을 묻더라고 합디다. 해서 국제전화를 하려는데 공중전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 아주머니는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며 집으로 들어가 차를 끌고 나와 그를 태워 공중전화부츠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분을 다시 데려다주기 위해 가로등 밑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네요.


저는 같은 검은 머리에 비슷한 체구를 가진 이 두 아시아 여인에게 호주나 호주인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전혀 다른 답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전자는 아마도 호주라는 나라는 인종차별주의 국가로 되먹지 못한 놈들의 행세에 치를 떨어가며 증오할 것이고 후자는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난 처음 본 아주머니의 사려 깊음과 친절에 감동받아 순진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회로 호주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편견의 피해자로서 호주를 인종우월주의에 사로잡힌 국가로 생각하게 될 것이며 후자는 자신이 받은 그 감동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앞으로 이 세상을 걸어가다 또 우연히 만나게 될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전달하겠지요. 그러고 보니 편견은 편견을 낳고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 것 같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에는 진정한 자비란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만 한다는 구절이 옵니다. 그리고 이 자비심을 키우는 방법으로 자기 생각을 내세우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감정이입’을 권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보리심의 완성이라고 한답니다. 모든 존재 속에 내재하는 자비의 마음을 일컫고 있지요. 기독교에서는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주며 친절한 것이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다른 것’보다는 ‘같은 것’이 더 크게 보이고 ‘무관심’보다는 ‘공감’이 내 안에 더 풍요롭게 고이고 그래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이 전제된다면 자비 혹은 사랑은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작년 이맘때 저는 남부호주의 주도인 아들레이드 시내에서 공항으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타야했고 그 택시를 잡기 위해서는 호텔 쪽으로 가야했으며 또 호텔로 가기 위해서는 연이어 서 있는 상가들의 처마 끌을 벗어나 6차선의 대로를 건너야했습니다. 무릎 위에 놓인 가방과 휠체어 뒤에 매달린 배낭도 나를 힘들게 했지만 때마침 쏟아지던 소낙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길가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다말고 처마 밑에서 뛰쳐나와 우산을 받쳐주며 함께 길을 건너 준 어느 일본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비록 염소수염과 구레나룻 때문에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저는 당신이 늘 저한테 지어주던 그 미소를 보았습니다.


박일원_소아마비 장애인으로 1995년 호주로 이민 가서 현재 다문화 장애인 인권 옹호협회(MDAA)에서 소수민족인 한국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KBS와 동아닷컴, 열린지평 등에 호주와 호주 장애인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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