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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변장된 축복이었다.

“짧게 살고도 오래 사는 이가 있다. 그의 이름이 개척자다. 그의 눈은 앞을 보는 눈이요, 그의 가슴에는 보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무슨 일을 남기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느냐? 그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언제나 이것을 묻기 위하여 이곳에 서 있습니다.”

이 글은 필자의 향리에 있는 어느 대학의 상징탑에 새겨져 있는 ‘개척자’란 시의 전문이다.
이 시에 이 달에 만난 박영주 씨(NSW 토지국 공무원)를 대입하면 꼭 맞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장애를 이긴 개척자 박영주   ⓒ권순형

그는 한인 장애인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짧게 살았지만 오래 산 흔적이 그의 삶 굽이굽이에 묻어있었다. 그의 눈은 앞을 보고 있으며, 그의 가슴에는 보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서있는 자리는 무수한 장애자들에게 “그대는 무슨 일을 남기려고 이 땅에 태어났느냐? 그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 서있는 듯했다.

필자는 88년 장애자 올림픽 취재 이후 무수한 장애자들을 취재해 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개척자’의 반열에 ‘옹립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걸출한 삶’을 개척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눈물이 한강을 이루고 있었으며, 칠흑같은 어둠속,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정글에서 길을 개척하는 것같은, 어떨 땐 죽음을 넘나드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몇 달 전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김선태 목사가 그러했고, 송명희 시인이 그러했고, 백악관 차관보로 있는 강영우 박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인상 깊은 취재원은 맹인 최초로 한국 대학 교수가 된 이익섭 교수의 외침이었다.

“장애는 불편이지 불행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경험이 농축된 이 한 마디를 얻기까지 그는 무수한 상처를 딛고 일어서야 했다. 맹인이었던 그는 한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당시 각 대학 입학요강에 단 한 줄로 표현된 지체부자유자에게는 지원자격까지 제한하는 문항과 싸워야 했다. 그는 모친과 함께 서울 시내 각 대학 교무처장, 입학처장, 총장실을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어야 했다. 

그렇게 드나들어도 안된다는 대답만 무수히 들어오던 그에게 하루는 상상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세칭 일류대학 총장이 장애아들을 두고 눈물로 밤새는 그 모친에게 툭 던진 한마디였다.
“이 학생 말귀는 제대로 알아듣습니까?”

장애자 본인을 앞에 세워두고, 어떤 상처를 받게 될지 아무런 의식 없이 툭 던진 이 말 한 마디에는 장애자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필자의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는 이 교수의 말을 옮겨보자.

“나는 단지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인이면 으레 청각장애도 있고, 말귀도 못알아듣는 저능아 정도로 취급하는 무서운 편견이 있더군요. 보이지 않을 따름인데 말입니다. 내가 넘어야 할 산이 어디까지인지 측정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수 십년 전인 70년대, ‘한국 최고의 지성, 최고의 석학’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갖다 붙일만한 일류대학 총장의 장애자에 대한 인식과 편견이 이 정도였다면, 일반인의 편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가 물건을 사려고 문방구에 들러도 주인은 물건을 팔기는커녕 구걸하러 온 거지인 줄 알고 소리치며 쫓아내더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는 전혀 상관없이, 장애가 된 이들은 사회의 냉대와 편견 때문에 항상 슬픈 애가(哀歌)를 눈물로 삼켜야 했다. 이 달에 만난 박영주 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기억을 물었더니 그만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차별이 많다는 것이었어요,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처음엔 뭔지 몰랐는데, 엄마가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저는 나가고 싶었는데, 나가면 아이들이 머리를 잡아당기고, 치마를 당기고 얼마나 놀림 받았는지 몰라요. 너무 놀림 받아 무척 힘들었어요. 옆집 아줌마가 흑인남편 둔 분이었어요. 그 아줌마가 친구가 되어주었어요, 아줌마의 흑인 아이도 저처럼 놀림받고 있으니 바깥에서 그 아줌마가 친구가 되었어요.”

인종과 장애에 대한 차별, 동병상린의 애가가 그의 어릴 적 애틋한 기억이었다.
눈으로 듣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 교민 사회에서 없던 길을 개척해낸 개척자였고, 선두주자로 걸맞는 묵직한 일을 지치지 않고 잘 해내고 있었다. 20대 대학생 정도의 청순한 그의 이미지는 40대, 23년의 직장 경력을 가진 커리우먼이었다. 바쁜 직장생활을 쪼개내어 ‘농아’ 혹은 ‘장애’라는 이름의 행사가 있으면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그의 손길이 필요했고, 그는 아낌없이, 그리고 정력적으로 활동해왔음이 그의 이력 가운데 나와 있었다.

20년 전 아시아태평양 농아 아시안게임 자원봉사를 필두로, 뉴질랜드농아올림픽 한국대표팀 자원봉사, 세계농아교육대회, 아시아태평양 농아교육대회, 시드니올림픽, 시드니장애자올림픽, 멜본농아올림픽 등의 굵직한 행사의 자원봉사를 했다. 호주농아포럼 호주여성장애 대표로 참석하고, 시드니 청각장애인 학부모회 강연, 농아교육 네트워크 웰빙음식 김밥강사, 한인장애우 공간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2002년 이후 지금까지 시드니 청각장애인 공무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15년 전부터 10여 명의 동료들에게 수화를 가르쳐 지금은 정상인 직장동료 5명이 수화전문통역가로 활동할 만큼 성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수화통역자 시간당 100불이 넘는다고 하였다.) 지금은 다문화장애권익옹호협회 회원으로, 또 국제장애인의 날 NSW 주정부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인인 그가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한국관광공사 한국홍보대사로 선정되어 활동하고 있다. 장애가 결코 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증명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사회활동분야라면, 그의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을 발휘하는 전문기술에도 탁월함이 드러났다. 국제 컴퓨터 작동능력(ICDL) 경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호주대표로 선출되었고, 국제대회에서 4위를 하기도 했다. 세계장애인의 날 기념 사진전에 출품할 만큼 그의 사진은 작품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청각장애 예술 페스티벌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두 모녀가 부채춤을 공연할 만큼 각 분야에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삶의 절정은 눈으로 소리를 듣는(혹은 읽는) 실력이 6개 국 언어에 이른다는 것이다. 정상인이 귀로 듣고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순전히 ‘눈의 노력’으로 극복해 냈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만 소개한다면 그의 삶이 단순한 ‘태생 천재 장애자’의 미화된 ‘영웅 스토리’로 묻힐 뻔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척자’로 서기까지 그에겐 멘토가 된 어머니 박광자 집사(시드니중앙장로교회)의 헌신적인 돌봄이 밑받침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마치 헬렌켈러에게 셜리반이란 멘토가 있었듯이.

엄마 이야기

▲ 어머니와 함께 박영주   ⓒ권순형

박영주 씨가 출생한 1965년, 한국은 모든 면에서 신음하고 있던 때였다. 국민소득 100불이 안되던 그 시절, 모든 환경이 열악했다. 더더구나 장애아를 정상아 못지않게 키운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초인적인 노력이 요구되었다. 사회적인 편견은 워낙에 그런 탓에 당연하다 하더라도(물론 당연해서는 안되지만), 장애아를 위해 무엇 하나 갖춰진 것이 없는 그런 사회였다.

“백치 아다다란 영화를 볼 때, 나에게 이런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지요. 그런데 이런 아이가 태어났어요. 미아리에 살았는데 출생 5개월 쯤 되었을 때, 오열이 매우 심해서 동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때 청력을 잃었더군요. 일년 반 후에 둘째 아이가 곧장 말을 하는데, 영주는 소리만 지르고 말을 못하는 거예요.”

염색공장을 경영하고 있어서 비교적 넉넉했던 그의 집은 TV가 보편화되기전 동네 사람들의 안방극장이었다. 김일 레슬링 경기가 있으면 의정부에서 그의 집에 있는 흑백 TV를 보려고사람들이 올 정도였다.

“TV에서 진동이 나니 영주가 귀를 대더군요, 5세 때까지 병원에 가보니 이상이 없다는 소리만 해요. 친정 아버지 소개로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에게 가도 별 이상이 없었어요. 

병원에서도 그러고 해서 영주가 다섯 살 될 때까지는 청각장애가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용한 아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작은 아이는 유치원도 가는데 답답했어요. 지능 테스트는 이상이 없고, 단지 들리지 않은 거예요. 궁정동에 있는 농아학교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 집사는 충격적이고도 진귀한 경험을 했다.
“겨울방학 땐데 20대 청년, 18세 청년이 축구를 하는데 소리가 안났어요. 골인을 해도 환호성이 나지 않는거예요. 그때야 비로소 이들이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입학하러 왔다니 하니 좀더 큰 후에 데리고 오라고 하더군요.”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도 분명히 이상이 있는데도 이상없다는 진단을 몇 번이나 받았다. 그게 당시 한국의 의료수준이었다. 그런 진단 속에는 처방도 치료도 불가능한 것은 당연했다. 청력검사도 안해 줄 정도였다. 딸의 교육과 성장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여러 사람을 통해 다방면으로 알아보니, 마포 구수동에 구화학교가 있다 하여 8세난 영주 씨의 손을 잡고 찾아갔다.

“최병문 교장이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분은 궁정동 농아학교 교사였는데, 일본 대만 등으로 연수를 해보니 농아들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분이 뜨거운 열정만 있으면 말을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장애자들을 불러모으니 여러 곳에서 장애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농아들이 귀가 안들리는데, 통상 200번을 들어야 한 단어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때부터 ‘영주 씨의 셜리반’이 된 엄마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딸을 치유하기 위해 매주 새벽마다 단잠에 빠져있는 딸을 깨워야 했다. 2시간 거리에 있는 서울대학병원에 한 외국인 의사가 가르치는 구화프로그램에 참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어른도 하기 어려운 장애극복의 시작은 이때부터 처절하게 시작되었다.

새벽 단잠을 물리치고 엄마의 손에 끌려나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딸을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며 뜨거운 눈물을 삼켜야 했다. 발성연습 하는 클리닉 30분에 2만원 역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돈의 한계와 환멸을 느낄 정도였다고 하였다.

집에서는 모든 물건마다 한글로 이름을 써서 붙인 채 딸에게 단어를 가르쳤다. 처음부터 그는 딸에게 수화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수화가 편리하면 입을 영영 닫을 가능성이 있어 구화를 가르쳤다고 했다. 정상인도 두 귀를 잃으면 두세 달이면 말을 못한다고 하였다. 듣지 못하면 뇌에서 내려야 하는 지령을 못내리니 어느 정도 지나면 실어증에 걸린다고 하였다.

“구화학교 교장 선생님은 수화는 말하는 것의 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수화를 먼저 배우면 성대가 간답니다. 말이 어려우니 손짓만 하다보면 성대를 쓰지 않으니 굳어진다는 것이지요. 딸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 물 한 모금 마시고 가글가글을 시켰습니다. 한국에서는 양치질을 많이 시키고, 양초 끄기, 깃털 날리기, 휴지 날리기 등을 시켰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들로 산으로 데려다니며 대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단어를 익히게 했다. 시냇물에 발을 담그면서 ‘졸졸졸’ 빗소리를 들으며 ‘똑똑똑’ 등의 의성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엄마의 지극한 노력으로 딸은 엄마가 시키는 말을 비슷하게 입모양을 움직이며 따라했다. 차츰차츰 단어를 이해하고, 말소리가 어눌하지만 나오기 시작했다. 일반 초등학교 대신 구화학교로 진학시켰다.

구화학교에서 그는 가장 똑똑하고 예뻤으며, 말도 제일 잘하는 아이였다. 최병문 교장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학생이기도 했다. 특히 학교에서 제일 말을 잘하는 덕분에 크고 작은 교내외 행사에 인사말을 그가 독차지 했다. 여기서 영주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라이온스 클럽에서 구화학교에 오르간인지 피아노인지 기증하는데 그 기증식을 화려한 호텔 홀에서 하게 되었는데, 사회는 개그맨이자 ‘후라이 보이’로 유명한 곽규석 씨였습니다. 외운 원고를 더듬거리지 않고 끝까지 해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당시 유명한 영화배우였던 김진규 씨가 제 손을 잡고 잘했다고 칭찬을 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 본 엄마의 마음은 또 달랐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주가 인사말을 외는 것이 마치 동물원 속의 원숭이로 느껴지는 아픔이 아직도 아려옵니다.”

또 한 번은 어버이날 행사 시작 인사말을 할 때였다. 이미 무용순서도 있는 그에게 두 개의 순서가 있는 것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미 무용 연습에서 진액을 다 빼다시피한 그에게 인사말은 엄청난 중노동에 가까운 순서였다. 더듬거리며 인사말을 하다 관중석을 보니 꽉 찬 사람들에게 주눅이 들어서인지, 피곤해서인지 그만 원고내용이 가물가물해졌다. 중간중간에 끊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더듬거리는데 저 앞에 ‘멘토인 엄마 얼굴’이 번쩍 뜨였다.

“엄마는 제가 더듬거리기 시작하자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시고 소리내지 않고 입으로 모양을 만들어가며 인사말을 내용을 가르쳐 주셨어요. 중간에 막힐 때마다 엄마의 입모양을 바라보며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통합교육

여러 가지 추억이 깃든 구화학교를 5년 다닌 그는 최병문 교장이 직접 그의 손을 이끌고 서강초등학교로 전학시켜 주었다. 5년 동안 ‘구화학교의 스타’였던 그가 학교를 떠나던 날, 그도 급우들도 모두 우울했던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구화학교 최병문 교장의 직접적인 부탁과 초등학교 교사들의 배려, 그리고 급우들의 이해로 별 어려움이 없이 마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특히 반 급우 중에 오빠가 농아라 구화학교에 다닌 여동생이 있어 그녀가 어른처럼 돌봐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중학교에 진학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영주 씨도 “중학교 때는 추억이 없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여기서 다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초등학교는 촌지를 드리면 선생님 한 분에게만 부탁하면 끝났어요. 중학교 때는 과목별 담당 선생님이 모두 15-16명이나 되니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아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셔서 잘 돌보아 주셨지만 영주가 말도 못하니 자리만 차지하는 정도였어요.”

여기까지가 당시 한국에서 장애아를 가진 부모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박 집사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숨겨 키우지 않았다고 하였다.

“솔직히 저부터도 영주를 낳기 전에 장애아들이 지나가면 옷도 당겨보고 괴롭혔어요. 영주가 집을 나가면 따라 나가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벙어리 나온다’고 해요. 아이들 붙들고 타일렀지요. 시장 가서도 얘가 말을 더듬거리면 외국사는 아이냐 중국 아이냐고 했어요. 그래도 무조건 데리고 다녔습니다. 한편으로는 죽으려고 자살 기도도 했습니다. 영주와 같이 죽으면 남편과 아들은 정상이니 잘 살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고통과 갈등이 농축된 말이다. 이런 아픔이 있기에 장애아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 자식만은 장애가 아니라는 그런 고집이 셉니다. 자기 아이는 다르다고 생각하지요. 영주는 구화학교에서 통합교육을 받았는데, 3학년 때부터 어느 정도 단어를 말했습니다. 정상인은 토씨가 붙어 나오는데 토씨를 제 음대로 합니다. 그러니 글로 쓰면 안돼요. 그런 점이 어려워요. 편지를 써도 조사가 안나옵니다. 같은 장애인 사위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서 그런지 완벽합니다. 장애아들도 책 많이 보고, 좋은 체험을 많이 하면 정상인과 같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가둬두면 그냥 그대로 되고 맙니다. 부모들이 지치는 부분도 있고, 또 그들의 사회적인 체면같은 것도 작용하지요, 당시 H 국회의원 아들도 장애자였는데 어느 날 슬그머니 없어지더군요. 미국으로 갔는지….”

한국에서는 어떻게 해도 고칠 수 없으니 해외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요즘 기러기 부모처럼 일본으로 가서 구화교육 받고 돌아오는 경우도 보았다고 하였다. 그의 생각은 항상 ‘영주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어느 나라로 가야 영주가 말을 배울 수 있을까?’로 꽉 차있었다. 한편으로는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딸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호주, 어떤 고통이 있어도 살 수 있는 나라

드디어 가족들은 결단을 내렸다. 영주를 위하여 각국의 이민법과 복지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복지법이 제일 좋은 것을 발견했다.

“뭐 우리나라도 뉴질랜드 버금가는 좋은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행되는 것은 별도지만 말입니다. 호주는 2번째로 좋더군요. 영국은 이민법이 없었고, 호주는 이란이나 월남에서 나온 사람이 있어서 당시는 백호주의를 표방했지만 이민이 가능한 카테고리가 있어 이곳으로 이민을 결단하고 온 것이 81년도입니다. 어떤 고통이 있어도 살아볼 수 있는 나라가 바로 호주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섭리 아래서 하시는 것이지 결코 우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민도 제가 머리 쓰고 제가 찾아서 온 것 같은데, 한국에서 같은 동네 서강교회 도건일 목사님이 호주에서 공부하신 분이었어요. 초등학교 다니는 엄마들이 같이 교회가자 해서 마음에 위안이나 얻으려고 갔는데, 마침 그분이 호주에서 공부하신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단한 그의 가족은 호주로 이민 오기 전에 광화문 서울상사에 보청기를 하나 샀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거금 40만원이었다. 박 집사는 영주 씨의 구화학교 동창이자 나중에 남편이 된 변규형 씨 어머니와 각각 20만원씩 내어 보청기 한짝씩 나눠가졌다.

처음엔 캔버라에 정착했다. 당시 초대 대사의 아들이 소아마비로 통역은 무료라는 정보를 들었다. 국가에서 보청기를 해준다고 했을 때, 한국에서의 엄청난 가격을 생각하며 돈 걱정을 했다고 하였다.

처음 영주 씨를 면담하던 날, 한국의 보청기를 보더니 “이 보청기는 아동용이 아니라 노인용”이라는 말에 또 한번의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어른용을 아동이 끼웠으니 낀둥 만둥하여 들리는 효과는 거의 없었다. 호주에서 무료로 해준 보청기를 끼자 그때부터 영어를 알아듣고 한국말을 알아듣더라고 하였다.

다시 시드니로 이주한 영주 씨는 일반학교(캔터베리 걸스 하이스쿨)에서 8개월 다니다가 ESL 영어공부를 하면서 10학년에 공무원 시험을 치렀다. 이때 그는 감동스런 경험을 한다.

“원래 저는 입모양 보고 말을 들었는데, 호주에 왔을 때 선생님들이 콧수염이 있어서 입모양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저를 위하여 선생님들이 콧수염을 밀어줄 정도였습니다. 한 사람의 장애자를 위하여 말입니다.”

울먹이듯 말하는 영주 씨 옆에서 박 집사가 한 마디 거들었다.

“한 사람의 인권을 굉장히 존중하는 나라가 호주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선생님이 카이젤 수염을 결코 깎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깎지 않을 수 있는 선생님의 권리도 분명히 강조되었겠지요.”

학년에 올라갈 때마다 헬렌 켈러의 셜리반 선생님처럼 일대일로 특별교사를 연결시켜주었다. 성장과정에서 그 교사가 인생의 멘토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카운슬링해 주었다. 박 집사의 말이다.

“어느 날, 선생님이 영주는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해요. 10학년에서 공무원 시험을 보라는 거예요. 75점 이상이면 공무원이 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때 떨어지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11학년에 다니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 권고에 따라 시험을 보니 75점 이상 되었습니다. 그래서 NSW 주정부 토지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직장 다니면서 나머지 공부를 했습니다. 학비 무료인 TAFE에서 트레이딩과 설계, 컴퓨터 드래프트, 컴퓨터 디자인 등을 직장 다니면서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공무원 생활에 벌써 23년째이다. 35년이면 정년퇴직이고, 중간에 정산하고, 70세까지 다닐 수도 있다고 했다. 직장에서는 장애자인 그가 불편 없이 일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을 다 해주었다고 한다. 호주 장애자 시스템이 너무 좋은데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물론 그가 장애자라 하여 차별받는 것은 없지만, 장애자라 하여 시설 외에 실력에 관계된 문제에는 좀 모자라도 좋다는 식의 역차별을 받는 일은 없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느냐의 직무능력만 있으면 장애나, 인종, 종교의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유 없이 흉보고 힘들게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화기도 정부에서 문자로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기 시작한 그의 활동영역은 종횡무진 연결되었다. 공무원 장애자가 200명이었는데 정년퇴직하여 60여 명이 모이는데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다. 김밥과 해물 파전을 호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파라마타 농아복지회에서 한국 요리 해물파전을 가르칩니다. 무슨 일이든 가르치려면 자격증을 따야 합니다. 모든 요리는 가르치려면 비록 무료로 가르치는 경우라도 따야합니다. 위생법도 배워야하고 말입니다. 수화도 자격증이 있어야 합니다. 엉터리로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지요.”
결혼과 가족 이야기

일곱 살에 처음 만나(남편 변규형 씨가 두 살 연하) 일 년만에 헤어졌다가, 호주로 이민 올 때 보청기의 한 짝씩 나눠 낀 남녀는, 인생에서도 반쪽씩 반쪽씩 맞춰져 온전한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그들의 끈끈한 연줄이 끊어지지 않았다.

가톨릭 의대 출신인 외과의사로 수술을 잘하던 명의인 시아버지가 대전에 개인병원을 개업하므로 규형 씨는 구화학교 유치부와 1학년을 다니다가 발성연습 도중에 대전으로 옮겨가 일반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충남대학교 농생물학과를 졸업하고, 90년도 대학원 진학 전 캐나다 여행을 하려다가 그때 카나다가 아닌 호주로 와서 영주 씨와 서로 약혼 반지 교환하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 박 집사의 말이다.

“7살 때부터 소풍가면 손 잡고 다녀 아무래도 커서 결혼하면 어떡하지 하며 부모끼리 농담 삼아 이야기한 것이 진담이 됐습니다. 서로 정상인을 원했는데 그게 안됐습니다. 사위 쪽에서도 돈 많이 벌어 빌딩 하나 사놓고 민며느리 삼을만한 정상인을 원했지요. 정상인을 찾았지만 대부분 돈 보고 오는 사람이었지, 사랑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영주도 예쁘장하고, 마음이 착한데 동양 여자라고 잠깐 살다가 싫어지면 어떻게 돼요? 아이들끼리 약혼하고 한 달 후 한국에서 결혼했습니다.”

호주로 온 변씨는 처음엔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다가 4년만에 5배로 확장되던 회사가 어느 날 문을 닫는 바람에 경찰청 청소업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컴퓨터 회사에서는 고객을 상대로 하기엔 청각장애로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혼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 더 맞는 것 같다고 하였다.

“회사 다닐 때는 못가겠다고 하고, 아프다고도 하더니 이 일을 맡고 나서부터는 아프다는 말을 안하고, 월급도 많고 그래요.”

부모가 장애일 경우 1대에 모든 장애가 일어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 통례인데 이들에게는 두 아이(우람, 아람)이가 청력 장애를 가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가족 전체를 검사했는데, 아이들을 마취시켜 놓고 하고 멜본과 캘리포니아에 보내 결과를 알아보았습니다. 아들은 양쪽 귀가 약간 살아있고, 딸은 아빠처럼 한쪽은 절벽이었고, 한쪽은 약간 들릴 수 있는 귀였습니다. 그래도 잘 안들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람이 아람이는 정상과 똑같이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다. 귀는 안들렸지만 아들 우람이가 캡틴까지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땐 아이들이 다 그의 옆에 앉으려고 할 정도로 공부도 정상아들보다 잘하는 편에 속했다.

어쨌거나 특이한 가족들의 장애로 이들은 서로 입모양 보고 말을 듣고, TV 소리를 다 죽이고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입모양만 보고 웃는 가족이라고 하였다. 이런 가족의 장애 때문에 불편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박 집사의 말이다.

“한번은 외출하면서 열쇠를 안가지고 나왔어요. 집에서 사위는 자고 있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몰라요. 아마 벼락이 쳐도, 불이 나도 모를 거예요. 초인종을 누르고 눌러도 안들리는 거예요. 그때 그렇게 지쳐서 앉아있는데,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물을 뿌리고 싶었습니다.”

이들 모녀는 탁월한 부채춤으로 각종 행사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영주 씨는 새순교회 장애우 모임인 사랑반에서 수화찬양을 돕고 있다. 제 1회 한인여성의 날 첫 수상자가 된 그에게 주어진 상금 중 일부를 떼어 애보리진 장애인들에게 기부하기도 하고, 그들을 위해 부채춤을 선사하여 흐뭇한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12월 3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장애인의 날. NSW주 홍보대사로 운동선수, 연극배우, 변호사 등 장애를 가졌으면서 성공한 사람 19명을 뽑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임명된 그에게는 해외에 나가게 되면 모든 수당이 다 지불되고, 수화 통역자, 코디네이터, 매니저 2명을 대동하며 차량 제공도 한다고 하였다.

장애를 이겨낸 그에게는 또 하나의 개척자의 길로 이민 사회에 동일한 아픔을 가진 자들에게 가슴 벅찬 비전메이커로 우뚝서리라 확신한다.

글- 호주 크리스챤 리뷰 편집국장 송기태 ,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 권순형/ 호주 크리스챤 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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