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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

“주한미군에 몸담고 있지만 한미 양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동안 한국과 미국, 남북한 사이의 어려운 순간마다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지만 큰 실수 없이 관계를 푸는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남단 제주도에서 태어나 최북단 판문점에서 일하는 사람, 판문점을 1000회 이상 드나들며 한국의 입장을 미국에 설명하고, 미국의 입장을 한국에 설득하는 가교역할을 해온 사람. 바로 김영규 주한미군 공보관이다.

그에게는 직함이 두 개 더 있다. 유엔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 공보관.

앞만 보고 달려온 그가 올해 환갑을 맞았다. 주한미군과 인연이 맺은 지 올해로 31년째다. ‘회한이 무엇일까’하는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용산의 작은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김영규 공보관

-벌써 환갑잔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환갑인 사람들은 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벌써 그 처지가 됐습니다. 마음은 ‘박남정’인데 남들은 ‘김정구’로 보겠구나 생각하니 슬픕니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늙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해야죠. 지난 3월 같이 근무하고 있는 미군 직원들이 작은 파티를 열어줘서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그때 환갑임을 실감했죠.

90년대 판문점에서

-그럼 이제 주한미군 공보관을 그만두시는 겁니까.

아직 할일이 많이 있습니다. 주한 미군 측에서 5년 계약 연장을 요청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일단 5년간 더 일해보고 필요하면 다시 연장 근무할 겁니다

-31년간 외 길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언제 가장 보람을 느꼈습니까.

분단 상징인 판문점을 취재하길 원하는 국내외 기자들에게 정확하고 좋은 기사를 쓰도록 돕고 필요한 사람들의 판문점 방문을 안내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한미관계, 남북관계가 어려워질수록 제 임무도 어려워지지만 동시에 빛이 납니다. 그런데 최근 이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감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한 방송국에서 판문점을 무대로 한 생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싶다는 요청이 왔습니다. 정말 어렵게 성사시켰는데 방송된 프로를 보면서 ‘정말 내가 잘했구나’ 하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어려웠을 순간은 없었나요.

왜요. 너무 많았습니다. 가장 힘들 때는 2002년 의정부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여중생 <효선·미순양사건>이었어요. 미군이 주최한 추모 촛불집회에 갔더니 두 학생 영정 앞에 꽃이 놓였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저 뿐 아니라 집회에 참가한 미군들도 누이동생 같은 여중생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많은 미군들이 즉석에서 추모비건립을 위한 성금을 냈습니다. 미군법정에서 배심원들은 진지한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했지만 무죄가 선고되고 우리 국민들의 반대시위가 격화됐을 때 허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김영규 공보관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은 한국인이나 미군이 똑 같은데 서로의 입장이 잘 설명되지 못할 때 가장 안타깝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1989년 임수경 씨가 판문점을 통해 남측으로 넘어왔을 때입니다. 여러 날 북측 판문점지역에서 행사를 했습니다. 이때 중국군 장교가 남측으로 내려오고 정말 정신이 없었지요. 임수경 씨 연설을 들으며 ‘한국 젊은이가 이렇게 순수하게 통일을 염원하고 있구나’하고 감동 했습니다. 임씨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려는 순간 한국군 장교가 실정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고 경고하고 북측에서는 임씨를 환호하고 이런 상황이 답답했습니다. 그동안 생각한 정형화된 통일의 개념이 임씨가 보여준 순수한 열정 속에서 깨어진 것이죠. 그날 집으로 돌아와 너무 답답해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수녀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느꼈던 그날의 감정을 털어놓은 기억이 있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31년 동안 주한미군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판문점을 통해 본 남북한 문제’나 ‘주한미군에서 일하면서 본 한미관계‘ 같은 주제로 책을 쓰고 싶습니다.

80년대 딸 민지와 함께

미군은 이전에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최근에는  지원적인 역할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1990년 비무장지대 철책에서 철수하고 1994년 평시 작전통제권 마저 한국군에 이양됐습니다. 내 눈으로 지켜본 이런 변화의 과정을 기록하고 싶어요.

다른 한 가지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현재 새남터 성당에서 사회복지분과를 맡고 있는데 노인이나 장애인분야로 확대해서 나눔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직업이 있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10여 년 전 김 공보관은 퇴근길 여중생 다섯 명이 길거리를 서성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울산이 고향인 여중생들은 가출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것. 그는 이들을 택시에 태워 안양 집으로 데려왔다. 밤 11시에 저녁을 해먹이고 다음날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바래다줬지만 한명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고 속이 많이 상했단다.

“그래도 세상에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꼈으면 그것으로 내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닌가요.”

애기를 되돌려서 그가 주한미군과 인연을 맺은 사연을 물어봤다.

카투사 시절 (왼쪽 두번째)

-어떻게 주한미군에서 일하게 되셨나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려고 했지만 ‘고도근시’로 번번이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학원에서 영어강사를 하다가 30살의 나이로 뒤늦게 카투사에 입대했습니다. 카투사에 배치됐습니다. 카투사에는 영문기사를 쓰는 일을 했지요. 미군 측에서 마음에 들었는지 제대를 앞두고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1979년 제2사단, 1980년에는 미8군 사령부로 옮겨 31년간 공보업무를 맡아왔습니다.


1973년 연세대 졸업식 숙부와 아버지

-원래 영어를 잘하셨나요.

영어를 좋아해서 열심히 한 편이지요. 군대에 가기 전에 영어강사를 한 것도 큰 도움이 됐고요. 카투사에 배치되고 나서 영자신문인 <인디어헤드>기자 선발 시험을 봤는데 80점을 받았습니다. 2등이 40점 정도였으니까 잘한 편이지요. 이후 3년 동안 2사단에서 영자신문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영어와 인연을 맺게 된 겁니다.

-혼혈아들에 대한 관심을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인디어헤드>라는 영문신문을 만들면서 혼혈아들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인 어머니와 미군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은 사회에서 버린 사람들이었지요. 게리 블룸필드라는 동료가 있었는데 미국 집에서 입던 옷들을 가져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지요. 그와 함께 <성 나자로 마을>과 동두천에 있는 혼혈아들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이를 계기로 한국 언론에서도 혼혈아의 비참한 삶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미군 내에서도 <혼혈인 협회>가 결성되었지요. <샬롬 하우스>라는 학교가 세워져 저도 일주일에 두 번씩 이들에게 영어를 6년 동안 가르칠 기회를 가졌습니다.

-지난해 푸르메재단에서 장애인들이 판문점을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장애인의 방문이 처음인가요.

부끄럽게도 처음입니다. 장애인들이 판문점에 온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죠. 그동안 판문점은 부부면 안 되고, 12살 미만이면 안 되고,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미국 문화의 상징인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고 등등 제약이 너무 많았습니다. 처음 푸르메재단에서 장애인과 함께 방문하고 싶다고 제안 받았을 때 상상을 못했습니다. 처음이니까요. 하지만 미군들은 사회적 약자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하더군요. 제가 판문점을 다닐 때 몰랐는데 막상 장애인과 함께하면서 판문점이 문턱과 계단 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참 부끄러웠습니다. 앞으로 장애인들이 마음 놓고 방문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점차 보완하겠습니다. 제게 지난 행사는 눈이 번쩍 뜨일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2006년 푸르메재단 주최 ‘JSA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중 (뒷줄 왼쪽 두번째)

의 사무실은 용산 미8군 영내 공보실이지만 활동 영역은 판문점 <자유의 집>과 <군사분계선 내 회담장>. 말 그대로 JSA(공동경비구역)의 핵심적인 장소다. 그에게 무엇이든 물으면 자신이 말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으로 통한다.

31년간 한 길을 보고 달려온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복 받은 사람’이라며 웃는다. 자신은 “앞으로 이 길을 10년은 더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다’고 말이다.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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