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담기

 



 


쓰레기봉투를 묶어 내놓을 때마다 강서구 어딘가 계시다는 교무님이 생각납니다. 두 달 반 만에 겨우 한 봉투 채워 내놓으신다는 분입니다. 기저귀가 한 짐이라는 핑계를 대보기도 하지만, 보름이 멀다하고 20리터짜리 큰 봉투를 여며 끙 소리 내며 내놓는 저로서는 ‘두 달 반에 쓰레기봉투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될 그 삶이 어떤지 잘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다만 냉장고 속의 날짜 지난 두부가 맷돌만큼의 무게가 되어 마음을 누르는 것을 보며 조금씩 달라질 거라는,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어 바닥에 툭 던져놓은 신문을 볼 때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의 아침이 생각납니다. 세간나고 첫 살림집을 얻은 그 동네는 조금만 빨리 걸으면 등에 땀이 솟는 높은 동네입니다. 눈이 어지간하게 내린다 싶으면 마을버스가 끊기는 달 아래 동네입니다. 그곳에서도 결혼 전에 보던 신문을 계속 보았는데, 어느 날 현관 문고리에 초록색 신문주머니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 사자암 종소리가 들리고 조금 있으면 털털 거리는 오토바이 소리, 곧 계단 오르는 소리, 현관문에 주머니 스치는 소리가 나고 탁탁탁 계단 내려가는 소리, 그리곤 부다다다 털털 오토바이가 자리를 뜹니다. 신문 주머니가 매달린 뒤로 신문은 늘 두 번 접혀 주머니 안에 담겨 있었는데 젖거나 찢어지거나 먼지가 묻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마을버스가 못 다닐 정도라면 승용차는 물론이고 그보다 가볍고 작은 탈것들은 길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 날이면 등산화를 꺼내 신은 후에야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눈이 내리는 날에도 신문은 늘 주머니에 들어 있습니다. 이 길을 어떻게 오셨을까, 이런 날은 하루 쯤 못 받아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세간나고 몇 해가 지나 새 식구를 맞았습니다. 날마다 새로 맞는 하루, 처음 해보는 일들이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만으로도 허둥대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른들 말씀은 그른 법이 없어서 백일이 지나니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자는 아기를 눕혀 놓고 옥상에 빨래를 널고 오는 기민함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오르는데 옥상 철문에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습니다. “문… 살살~!!! (2층집 아기가 놀래요!!!)”



한 건물에 다섯 집이 살다보니 드나드는 사람 수가 적지 않습니다. 식구마다 다짐 받는 것을 넘어서 손님에게도 아기가 있으니 조심해달라고 단속하고 있습니다. 한여름이면 ‘아기 빨래가 많지요’ 하면 알은체를 해주신 그 분들은 옥상에 빨랫줄도 꼭 한 줄은 비워두셨습니다. 장마철 하루 만나는 햇볕에도 빨랫줄 네 줄 가운데 하나는 어김없이 202호 몫이었습니다.


3월초 이사를 하고 한참 지나서야 ‘떠나가는 집’ 형국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살림살이도 결혼기념일을 함께 맞다보니 여기저기 긁히고 때 묻고 삐걱거립니다. 두 돌이 다 되어가는 딸이 냉장고를 가리키며 묻습니다.


“엄마, 이건 뭐예요?”


“냉장고가 긁혔어요. 이사할 때 긁혔나봐요.”


감자를 썰며 대답하니, 통통통 방으로 뛰어 갑니다.


“엄마, 밴드 붙였어요. 냉장고가 아야아야 해요.”


멸치를 건진다, 마늘을 찧는다 부산한 중에 보니 냉장고 긁힌 데에 일회용 반창고가 붙어 있습니다.



한 주는 하루가 쌓여 되고, 또 한 달은 한 주가 쌓여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안 듯 새삼스러운 날들입니다. 그 하루 속에 교무님 같은 소유와 소비를 넘어서려는 노력, 상도동에서 <한겨레>를 배달하시는 분의 성실함, 새로 온 아기를 제 식구처럼 돌보는 이름 없는 빌라에 사는 네 집 가족들의 세심함, 냉장고의 아픔도 느끼는 아이의 그 마음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차정신_아름다운재단에서 월간지 <콩반쪽>을 만드는 간사입니다. 나누며 사는 우리 이웃들의  알콩달콩 이야기를 담는 <콩반쪽>을 만들 때마다 사진 속의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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