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함께 걸어온 정화원. 이희숙 부부

 


는 살아가면서 닮는다고 한다. 사뭇 다르게 생긴 남편과 아내일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에는 습관이 닮고 성정이 비슷해지고 결국에는 생김새 마저 닮아가기 마련이다. 부부가 닮으면 잘산다고 한다. 여러 면에서 서로 닮은 부부가 화합하면서 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더욱이 그 길이 평탄한 곳이 아니라 덤불이 우거진, 남이 가지 않은 길이라면, 외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부부의 의미는 더욱 소중하다. 시각장애인 정화원의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왕성한 의정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옆에는 늘 부인 이희숙 여사가 있다. 방송 출연을 위해 KBS스튜디오를 찾은 한나라당 정화원 의원 부부를 만나봤다.




혼하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정) 올해로 벌써 33년이 됩니더. 정말 같이 오래 살았지요.


이) 이제 고만 헤어질 때도 됐는데....(정) 그래 이번 기회에 확 갈라서자.(웃음)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정) 제가 부산맹학교(중등과정)를 졸업하고 서울맹학교(고등과정)에서 침구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침술사 개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향은 상주였지만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와서 부산에 정착했지요. 당시 환자가 하루 80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부인 이희숙 여사)이 다리가 아프다고 나를 찾아왔던 거지요. 제가 원래 입담이 좀 좋습니까? 치료하면서 살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성격도 좋고 마음에 들어서 프로포즈를 한 거지요.


 혹시 한 두 번 치료받으면 사모님이 금방 나으셨을텐데 연애하시려고 일부러 안 고쳐주시고 자꾸 오시라고 한 것 아니세요?


아, 그런 면이 있지요. 마! 부인하진 않겠십니더.


그때 친정에서는 반대하지 않으셨는지요?


(이) 왜요?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지요. 그런데 내력을 알고 보니 양반인 진양 정씨의 종손이고 생활력도 있어서 밥 굶고는 살지 않겠다 싶으셨는 지 부모님들의 반대가 나중에는 많이 누그러졌지예. 이 양반은 3살 때 전쟁이 나서 고향 상주에서 피난을 가다 비행기 포탄의 파편이 눈 안에 들어가면서 눈이 안보이기 시작했대요. 처음에는 보이다가 조금씩 어두워져서 19살에는 완전히 눈이 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울었습니다. 눈이 안보이니 방황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홧병을 다스리기 위해 술로 지새우기도하고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는 말을 듣고 동정 반, 사랑 반으로 결혼을 하게 된 거지요.


(정) 내가 좋았으면 좋았다고 케라. 와, 동정반이라고 말하노.(모두 웃음)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것으로 유명하신데 장애인 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아마 시력을 잃지 않았으면 장애인도 모르고 장애인운동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자나 외교관이 되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 장애인의 현실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나라도 나서게 된 거지요. 1970년대 중반 맹인들이 침술행위를 할 수 없게 의료법이 개정된 적이 있어요. 부산에서 상경해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내가 원래 입담이 세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도 하고 구호도 외쳤습니다. 그때 보건복지부의 한 국장이 저에게 “맹인이 침을 놓을 수 있는 나라로 이민을 가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당신같이 정책을 잘못 만든 사람이 이민가라” 소리쳤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서 장애인 운동에 뛰어들게 된 거지요.


정 의원께서 평소 집으로 일거리를 가져고 오시나요?


(이) 그럼요. 많이 가지고 오지요. 아예 안방을 내줬습니다. 안방을 혼자 쓰고 계신데 시간을 뺐지 않으려고 식구들이 접근하지 않습니다. 왼손 검지를 보시면 지문이 다 닮아 없어졌어요. 그 정도로 열심히 점자책을 읽고 공부하십니다.


(정) 아마 비장애인이 읽는 속도의 1/5~1/6밖에 안되기 때문에 다섯 배, 열배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쫓아갈 수 있습니다.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할 때는 연설문과 질문지를 모두 외워야 했습니다.



대정부 질문 전에 본회의장 동선을 따라 걷는 연습까지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존경하는 의원들이 늘어났다는 기사를 읽고 기분 좋았습니다.이제 17대 국회 임기가 1년밖에 안남았는데 그동안 의정활동에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정부와 사회에서 장애인을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예산문제만 나오면 꼬리를 감춥니다. 노인수발보험제도를 시행하겠다고 하면서 장애인수발보험은 예산이 없다고 미루고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보건복지부 관료들의 마인드가 바꿔야 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복지법 등을 발의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의욕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임기중 남은 과제가 무엇입니까?


다른 OECD 국가와 비교하면 장애인 예산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OECD 국가의 20%에 불과하고 28개국 중 멕시코를 제외하곤 꼴찌를 달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보건복지부가 장애인예산을 지방정부로 이관하면서 사실상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 중증장애인우선구매특별법과 중증장애인연금법 등을 통과시키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합니다.


의정활동을 하시기전에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정) 푸르메재단이 준비하는 것과 같이 저도 장애인 복지타운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10년 전 지리산 일대 105만평의 땅이 나와서 계약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때 평생 번돈 20억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땅주인은 25억원을 요구했습니다. 남은 차액 5억원을 벌겠다고 주식에 투자했다 결국 20억원 모두를 잃었습니다. 만약 그때 성사가 됐으면....


(이) 평생 모은 돈으로 그때 주식을 안했으면 지금쯤 복지타운을 건립하기 시작했을텐데 아쉽지요. 돈을 다 날렸을 무렵 새벽, 거실에 나가보니까 이 양반이 화가 나서 담배를 피우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잃은 돈은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앞으로도 또 벌수 있지 않으냐”고 위로했어요.


(정) 백이사도 절대 증권 많이 하지 마세요. 많이 하다가는 끝내 망합니다.(웃음)


장애인단체를 보면서 바라는 점은 무엇입니까?


조직이나 단체나 장애인들의 공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특히 장애인계에서는 장애인 전체를 위해 일하려는 자세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부족하고요.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고 장애인 문제를 다뤄줘야 하는데 언론은 냉담할 뿐 아니라 장애인들의 절박한 요구를 집단이기주의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정당과 정부도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유권자로 봐야 합니다.


국제보건기구(WHO)에서는 선진국의 경우 국민의 10%이상이 장애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25%, 호주 17%, 영국 16%로로 보는데 우리나라에서만 4.5%라고 주장합니다. 일본 만해도 등록된 장애인이 7%가 되는데 말입니다.


우리사회 장애인에 대한 시간과 정책이 바뀌려면 미국의 루즈벨트 같은 장애인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남은 임기동안 장애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십시오.


17대 국회에 장애인을 대표해 나와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이 등원한 것만 해도 큰 변화고 발전입니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장애인 국회의원들이 18대 국회에서 좋은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울러 정부의 주장대로 장애인이 200만명이라면 가족과 친지까지 합하면 1000만명이 되는데 장애인들이 결집된 힘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장애인이 대통령후보로 나와 50만표만 얻으면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정화원 의원은 처음 만나 불과 1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다. 이희숙 여사는 헤어질 때 내 손을 놓지 못하신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두 분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까마는 얼굴에는 여유와 웃음이 있다. 뒤돌아보지 않고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만난사람/글 =백경학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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