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꿈을 꾸게 되기까지


































2000년 11월. 사고가 나기 전까지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쿵따리 샤바라’ 이후 내놓는 곡마다 히트였고, ‘클론’의 인기는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군 것으로도 모자라 바다 건너 대만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돈과 인기를 거머쥔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선을 침범한 자동차 한 대에 의해 나의 인생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던 방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곤두박질하는 롤러코스터처럼 나 강원래의 삶은 까마득한 암흑 속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이다.














<가수 강원래>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 나는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했다. 그 믿음은 담당 의사로부터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도 깨지지 않았다.



‘누구보다 건강한 내가, 열심히 살아온 내가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다니… 말도 안돼. 거짓말이야. 이건 꿈이야, 현실이 아니라구.’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며칠 지나면 거짓말처럼 나아서 걸을 수 있을 거야.’



나는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하지만 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찌르면 피가 날지언정 털 끝 만큼의 통증도 느낄 수 없는 두 다리를 보며 난 차츰 두려움에 휩싸였다. 밝은 대낮에는 애써 웃어 보이며 희망을 품었지만, 어둠이 찾아오면 타들어 가는 입술을 깨물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마음으로 부둥켜 안으며 난 통곡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두려움은 분노로 변해 갔다.



나는 이렇게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화가 났다. 그들이 건네는 관심과 친절도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힘내라며 주먹을 들어 보이는 사람들의 격려, 안타까움이 섞인 위로조차 짜증이 났다.



‘당신들이 뭘 알아. 내 마음을 백 분의 일, 아니 천 분의 일이라도 알겠어?’



지금 생각하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다가온 사람들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마음을 헤아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래서 “강원래씨, 힘 내세요!”라고 격려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욕을 퍼붓기도 했다.



세상을 향한 불신과 분노는 재활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진이라고 해서 비껴갈 리가 없었다. 사실 난 치료 과정에서 의료진에게 서운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사고 직후 생사가 갈리는 대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간호사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인 받아야 하는데 마취할 시간이 다 됐네.”



“그럼 그 전에 빨리 받자.”



그들의 말은 내가 수술을 하다가 죽을지도 모르니 빨리 사인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 것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후로 많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심리치료사들이 나의 재활을 돕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내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치료는 너무 기계적인 것으로 보였고, 격려는 가진 자의 오만한 동정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갑자기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람이 재활하기까지는 다섯 가지 단계를 반드시 거치게 된다고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부정이다. 남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부정하는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그 희망이 부질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부정은 분노로 바뀐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늘도 땅도 사람도 모두 싫고 화가 나는 단계이다.



의료진조차 믿지 못하고 격려의 말에도 화를 내던 시기. 그 때가 내게는 분노의 단계였던 것 같다. 그렇게 분노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점점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네 번째 단계인 좌절의 과정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을 떠올렸다. 혼자 죽을까, 송이랑 같이 죽을까.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날마다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 아내 김송과 강원래 >




그런 내 모습이 어지간히 불안했던지 송이가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어렸을 때 두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이면서도 유럽 도보여행을 다닐 만큼 건강한 친구, 지금은 ‘바퀴 달린 사나이’로 더 유명한 박대운 씨였다.



박대운 씨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묘하게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두 다리 없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도 밝기만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일까? 게다가 박대운 씨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어떤 사람과도 다르게 나를 대해주었는데, 그런 태도에도 믿음이 갔다.



박대운은 여느 사람들처럼 힘내라거나 다시 일어나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닥친 현실을 냉혹하게 일깨워 주었다.



“앞으로 평생 동안 휠체어를 타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요.”



“어떻게 하면 휠체어를 잘 이용할 수 있는지 연구해 봐요.”



“휠체어를 타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박대운 씨의 충고는 그대로 내 가슴에 박혀왔고, 나는 어느덧 휠체어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편의점에 가지?’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은행에 가지?’



‘바닥에 물건이 떨어지면 어떻게 줍지?’



죽음만 떠올리던 내 머리 속은 이제 온통 휠체어 생각으로 가득 찼고, 박대운 씨를 통해 알게 된 장애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재활의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과정으로 접어든 것이다.



사람들은 재활에 성공한 장애인들을 보고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장애는 결코 극복할 수 없다. 다만 수용하는 것이다.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수용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바로 재활인 것이다.



2001년 여름. 나는 드디어 병원을 떠나왔다. 사고 당한 지 6개월 만에 재활에 성공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빠른 시간 안에 재활에 성공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을 한다.
“강원래는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돈이 있기 때문이다, 송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라고.



모두 맞는 말이다. 연예인이기 때문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받았고, 송이가 있어서 많은 힘이 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재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좌절의 단계에서 포기하지 않고 장애인으로서 삶을 받아들이려면 굳은 결심이 필요한데, 그것은 돈으로도 약으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본래 타고난 성격이 현실적인 편이다. 끈기나 집요함 보다는 내 한계를 인정하고 어차피 안 될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성격인 것이다. 그래서 클론 시절에도 안 되는 춤이나 노래는 억지로 연습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추구하지 결코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내가 욕심이 많고 악착 같은 성격이었다면 그렇게 빨리 재활에 성공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 황우석 서울대 교수와 함께한 클론 >



그와 함께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던 것도 나의 운이었다. 나만큼이나 괴로우면서도 늘 힘이 되어 준 송이를 비롯해서 묵묵히 내 곁을 지켜준 원도 형, 언제나 함께 있어 소중함을 몰랐던 준엽이, 어딜 가든 내 걱정을 잊지 않는 록기, 그리고 누구보다도 큰 힘이 되어준 장애인 친구들과 부모님.



그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나 강원래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나는 무대로 돌아왔다. 비록 휠체어를 탄 모습이지만, 가수 클론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요즘 나는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클론의 모든 곡을 휠체어 댄스곡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여전히 클론을 잊지 않고 있는 대만 팬들을 찾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중도 장애로 걸을 수 없게 된 환자들에게 담당 의사들이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은 강원래 씨와 같은 증상입니다.”



이 한 마디면 부정의 단계에서 머물던 환자들이 부질 없는 희망을 버리게 된다고 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강원래는 중도 장애인의 본보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의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 이왕이면 절망에 빠진 중도 장애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고, 더욱 열심히 살고 싶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절실한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물론 다시 걷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1%의 가능성도 안 되는 그런 희망보다는 나와 같은 장애인들이 좀 더 편안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고 싶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병원에서 일하는 한국인 의사가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처럼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나라에서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힘들 테니, 한국에서 한국 실정에 맞게 재활 치료를 받으라는 얘기였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장애인에게 각박하기만 하다. 휠체어를 타고 외출이라도 하려면 겁부터 나는 현실이다. 여기저기 턱이 많아서 힘들기도 하지만, 무턱대로 휠체어를 밀어주는 것을 도움으로 착각하는 의식도 문제이다. 이제 국민소득도 높아지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나라이니만큼 장애인 복지에도 힘을 기울여 달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길과 건물과 공공시설이 장애인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바뀌고, 그래서 더 많은 장애인들이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배려하고, 더 많은 장애인들이 직업을 갖고 떳떳하게 자신의 생계를 꾸려나가면 좋겠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 두 발로 춤 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휠체어 탄 사람이 휠체어 댄스를 추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기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