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알 만큼의 희망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


 









아침 신문을 보니 어느 가장이 자동차안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가족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고 한다. 남긴 유서에는 “더 이상 살 길이 없어서, 이 세상살이가 너무나 버거워서, 이 무서운 세상에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함께 간다”고 써있었다.


오후 5시 반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는「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나눔」이라는 프로그램을 내보낸다. 재정적으로 사정이 안 좋은 가정을 소개하고 청취자의 도움을 청하는 프로인데, 꼭 들으려 계획하는 것은 아니지만 퇴근길에 자주 듣게 된다.


얼마 전에는 어떤 가난한 어머니에 대한 방송을 했다. 아이가 모계유전으로 불치의 병에 걸리자 아버지는 이혼을 요구했고, 양육비도 주지 않았다. 몸이 허약한 어머니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이웃이나 친척의 도움도 사라져 가면서 살 길이 막막해지자 절망한 어머니는 마침내 죽을 결심을 했다. 오늘 기사 속의 가장과 마찬가지로, 무서운 세상에 아이를 홀로 두고 갈 수 없어 아이까지 데리고 동반자살을 계획했다.


내일이면 죽겠다고 결심한 날, 마지막으로 아이와 함께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바다에 갔다. 어둑어둑한 바다에 오징어배가 환하게 불을 켠 채로 모여 있었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 불빛 참 예쁘지? 너무 너무 예뻐.』

아이는 엄마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터뷰에서 그 어머니는 말했다.

『배를 보고 예쁘다고 감탄하는 아이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마음을 제 멋대로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는 권리를 내가 뺏을 수가 없어서 죽기를 포기했습니다...』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또 다른 가난한 어머니를 기억했다.

그 어머니는 늘 콩알 몇 개를 소중하게 품고 다녔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설상가상으로 가해자로 몰리자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맨 몸으로 길거리로 쫓겨났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인 형제를 데리고 너무나도 힘겨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의 집 헛간에 세 들어 살며 일을 찾았고, 자연히 살림은 초등학교 3학년 형이 맡았다. 그런 생활이 반 년. 그러나 아무런 직장경험이 없는 어머니가 죽도록 일을 해도 살림은 비참할 정도로 어려웠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세상이 원망스러워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죽기로 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일을 나가면서 어머니는 오늘은 집에 오는 길에 약을 사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래도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굶길 수가 없어서 냄비에 콩을 넣어 두고 집을 나서면서 맏이에게 메모를 써 놓았다.

『형일아, 냄비에 있는 콩을 조려서 오늘 저녁 반찬으로 먹거라. 물을 넣고 삶다가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다. 엄마가』


계획대로 그 날 그 어머니는 남몰래 수면제를 사들고 돌아왔다. 두 아이는 나란히 잠들어 있었는데 맏이의 머리맡에 「엄마에게!」라고 쓰인 편지가 놓여 있었다.

『엄마, 엄마가 말한대로 열심히 콩을 삶았어요. 오래 삶아서 콩이 물렁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간장을 부었는데 형민이가 ‘형! 너무 딱딱해서 잘 못 먹겠어,’하며 안 먹었어요. 그래서 반찬도 없이 거의 맨밥만 먹 고 그냥 잠들어 버렸어요. 엄마, 내일 새벽에 나가시기 전에 저 깨워서 콩 잘 삶는 법 꼭 가르쳐 주세요』


편지를 읽고 어머니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 저 어린것이 이토록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구나.』


콩 하나라도 열심히, 동생 입맛에 맞도록 삶아 보려는 아들의 의지가 너무나 기특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사왔던 약봉지를 치웠다. 아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게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살아보기로 작정했다.


그 어머니는 콩알 몇 개를 지갑에 넣고 다니며 힘들 때마다 꺼내 보고 아이들을 생각한다고 했다.

『콩알만큼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살아야지요... 하지만 따져 보면 콩알만큼의 희망이 아니라 호박만큼의 희망이지요. 제게 우리 아이들이 있고 제 몸이 더 나빠지지 않고 있고...』말하면서 그 어머니는 밝게 웃었다.


결국 가난에 절망하고 세상에 지친 두 어머니는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아직 세파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은 살아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과 목적의식이 더욱 강한지도 모른다. 아니, 본능적으로 희망을 보는 힘이 더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며 이리 치대고 저리 부대끼며 점점 그 힘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꾸 나를 밀어내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이 세상이 무섭게 느껴지다가, 문득 「아, 참 싫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내 한 몸둥아리 없어지면 그만일 것을,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잊고 평화롭게 잠들 수 있을 것을,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이기도 한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각박해짐에 따라 이런 욕망을 더욱 강해지는지, 작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사람의 수는 1만 305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는 게 힘들어서, 대학입시가 두려워서, 잘난 사람들 사는 세상에 나만 못난 것 같아서... 추풍낙엽처럼 생명이 스러지고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Where there is life, there is hope.)』라는 유명한 미국 속담이 있다. 이 세상에서 생명만 유지할 수 있다면, 희망은 늘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이다. 슬픔이 있지만 분명 희망도 존재하고 좌절이 있지만 기쁨과 행복도 존재하는 게 세상살이인데, 희망을 절로 주는 생명을 구태여 버릴 필요가 있을까. 석양에 예쁜 오징어배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이 세상, 정말 콩알만큼의 희망이 있어도 이 세상은 살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아마 그들은 콩알만큼의 희망도 이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그만큼의 희망도 주지 못했나 보다.  


<장영희 교수와 아버지 고 장왕록 교수>


한국 번역문학의 태두로 꼽히는 영문학자 고 장왕록(1924~1994)씨의 1남5녀중 셋째로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부모님의 극진하고도 올바른 진로지도로 장애는 그저 불편한 것일 뿐 남다를 것이 없다는 자세로 평생을 살아왔다. 서강대 영문과를 거쳐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85년부터 서강대 강단에 서고 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명작을 국내에 소개하고 한국의 명작을 외국에 소개하는 번역가로서 활동해왔으며 유려한 문체로 삶의 갈피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수필가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척추암이 도져서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더 깊은 공부에 돌입했다는 그의 학교 연구실에는 강단에 복귀한 스승을 환영하는, 갖가지 모양의 오색 종이테이프가 반짝이고 있다.



“나는 매일 공부한다. 무엇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즐거울 수 있는지, 어디 산이 아름답고 어디 공기가 더 깨끗한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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