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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시는 거예요 하느님?

김혜자 (배우. 월드비젼 친선대사)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연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여행, 그리고 자유입니다.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책은 내 방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책과 음악과 정원에 자란 꽃들이 나는 좋습니다. 그러나 연기자가 되고 유명해지면서부터는 늘 빠듯한 스케쥴 때문에 여행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 , 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으나 대부분 촬영차 떠난 일정이라서 내가 누리고픈 자유로운 여행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누가 나를 구속한 것도 아닌데 어떤 틀 속에 나는 갇혀서 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그토록 소중히 생각한 연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그 이미지에 맞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번 드라마 촬영만 끝나면 멀리 여행을 떠날 거야. 어쩌면 다신 안 돌아올지도 몰라.” 하고 말하는 것이 입버릇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반란을 꿈꾸지만 현실은 늘 제자리였습니다.

1992년 여름,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주말 연속극 <사랑이 뭐길래>가 끝나고, 나는 대학을 졸업한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 생애 최초의 자유로운 여행이 될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체코의 프라하, 그리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였습니다. 무엇보다 <프라하의 봄>이란 영화가 나를 매료시켰고, 헝가리언 댄스곳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CD 속지에 담긴 다 해진 바지에 맨발이지만 가르마를 단정히 가르고 바이올린을 켜는 남자와, 그의 아들이 벌거벗고서 칠 벗겨진 창을 배경으로 서 있는 흑백 사진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진 밑엔 ‘아들과 함께 있는 집시 프리마, 1935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비행기 예약을 알아보고 여행에 가져갈 가방을 챙기면서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오후,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월드비젼 코리아라는 곳으로부터였습니다. 그 단체의 회장이 직접 전화를 했는데, 그는 힘 있고 당당한 목소리로 대뜸 나더러 아프리카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내가 딸아이와 함께 곧 유럽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는 비영리 기독교 자선단체인 월드비젼에 대해 설명하면서, 외국에서도 유명 연예인이 그 일에 동참하고 있다고 나를 설득했습니다.

 월드비젼은 6.25 때 미국 목사 밥 피어스가 우리나라 고아와 과부들을 돕기 위해 세계에 호소한 것이 시초였고, 지금은 전세계 104개국에 월드비젼 지부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991년까지 도움을 받는 나라였다가, 그해 1992년부터 비로소 도움을 주는 나라로 전환이 되었으며, 그 첫번째 방문지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건 월드비젼 코리아 회장은 내게 월드비젼 친선대사가 되어줄 것을 정식으로사람들에게 요청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빵 모양의 저금통을 나눠주고, 그래서 모인 15만 달러를 이티오피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사랑의 빵 저금통 홍보 촬영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구호단체의 친선대사들이 많지만, 당시는 한국에서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친선대사’라는 말 자체가 내겐 낯설었습니다.

 나는 문득 아프리카를 여행지로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프리카 하면 영화 <정글북>이 생각나고, 밀림과 함께 수많은 야생 동물, <장원>이란 영화에서 덩쿨이 기어오른 수많은 나무들과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름 모를 꽅들 사이로 요청처럼 뛰어다니던 오드리 햅번도 생각나고, 얼굴에 이상한 무의를 칠한 원주민들의 안내를 받으며 정글을 헤쳐가는 내 모습이 상상되면서, 나는 선뜻 아프리카 여행에 동행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연만이 있고 탁 트인 넓은 대륙에서 뜨고 지는 강렬한 태양을 생각하니 고색창연한 유럽보다 더 많은 추억과 자유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딸아이에게는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자유와 추억을 만들자”고 말하고는 아프리카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인류가 화장품 소비에 180억 달러 , 향수 소비에 150억 달러, 애완용 동물 사육에 170억 달러 쓰고 있을 때,

그 뒤편에서는 아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1만 달러면 이 도시의 아이들을 모두 예방 접종시킬 수 있는데…

비행기가 중간 경유지인 인도 뭄바이에 잠시 내렸다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바바 공항으로 기수를 향하는 순간,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이 밀려왔습니다. 그곳에 가면 굶주린 아이들이 있다는데, 올해만 해도 무려 9백만명이 죽어가고 있다는데, 정말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어떻게 하지?

아디스바바에서 최종 목적지인 에티오피아 북부에 있는 아마라주볼로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 15인승 프로펠러 경비행기를 탔습니다. 처음 타보는 경비행기는 바람에 장남감 비행기처럼 흔들렸습니다. 아마라주볼로에 도착해 외국방문객을 위해 징어놓은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습니다. 방에는 군용침대가 하나뿐이고, 침대 한켠에 담요가 한 장 얌전히 개어져 있었습니다. 너무 긴 비행이라 피곤해 담요를 베고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너무 긴 비행이라 피곤해 담요를 베고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잠깐 동안의 잠이었지만, 나는 커다란 나무들과 낡은 지프레 올라타고 황톳빛 길을 무작정 달려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자 삶이 그렇듯이 그것은 다 허황된 꿈이었습니다.

 그곳 구호단체 직원의 설명을 듣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현재 에티오피아 인구 4천6백만 명 중 9백만 명 이상이 극심한 기아 상태이고, 살아남는다 해도 영양실조로 발육이 안 되거나 비타민A 결핍으로 실명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아 사망률은 1천 명당 142명이나 되고, 다섯 살 이하 사망이 1천 명당 122명, 1인당 국민소득은 130달러, 외채는 30억 달러라고 했습니다. 나는 본래 수치에 어두운 사람이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료시설은 8만 8천 명당 의사 한 명꼴이고, 의약품과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국민의 54 퍼센트가 오염된 식수를 마시고 있어서 풍토병 말리리아에 걸리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4년째 계속되는 가뭄과 군사 쿠데타 이후 이념이 달라서 빚어진 내전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상상했던 낭만적인 곳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 하다 못해 원숭이들이라도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으리나 여겼던 내 예상과는 달리, 어느새 슬픔의 먹두름이 내 영혼을 채워 버렸습니다.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다음 날, 다는 3개월 전까지 내전을 치른 콘볼차로 갔습니다.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ㅣ 놀가들은 흙으로 바른 벽에다 풀을 엮어 지붕을 올렸는데, 말만 집이지 고원 지대에 다닥다닥 붙은 흙집들을 보니 심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밥에 해당하는 것이 수수를 갈아서 빈대떡처럼 부친 인젤라인데, 부자들은 그 안에 양고기 다진 것과 야채를 넣어서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 양념 없는 수수떡 그 자체만 있어도 감지덕지입니다. 그것마저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곳이니까요.

 아이들은 구호물자르 나원준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을 입고 있는데, 그것도 너무 낡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맨 발로 다니기 때문에 발바닥은 딱딱한 구두 밑창 같습니다. 그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배가 고파 “인젤라 엘름! (엘름 ‘없다’는 뜻입니다)”을 수없이 되풀이 하면서도 목에는 무엇을 그리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디, 달게 없으면 단추라도 실에 꿰어 목에 건 아이가 있습니다.

 이 나라의 여인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몸매가 마치 정교히 다듬은 조각 작품처럼 생겼습니다. 얼굴빛은 엷게 뽑은 커피색이고, 무척 아름답습니다. 나라가 못살지만 않는다면 패션의 중심이 파리가 아니라 이곳 에티오피아의 어느 도시가 되었을 법 합니다. 아무리 떨어진 옷을 입어도 그 색감이 피부색과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예쁘고 껴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서로 내 손을 잡으려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만일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에는 옷을 걸쳤고, 머리 위에는 지붕이 있는데다 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이 세상 75 퍼센트의 사람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고통으로 바느질되고 슬픔으로 재단된 옷입니다. 콘볼차에 도착해 아무 기척도 없는 흙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흙바닥에 다 떨어진 담요를 깔고 뼈와 가죽만 남은 남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남자 배 위에는 말라서 궁둥이가 쪼글쪼글한 아기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둘이 퀭한 눈으로 정물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아빠인 듯한 남자가 내 눈을 바라보며 가신히 기운을 내어 말했습니다.

“난 말라리아오 죽어가고 있어요. 아이들도 언제 죽을지 몰라요. 병든 아내는 먹을 걸 구하러 나갔어요.” 

그 순간부터 내 눈에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해 아프리카를 떠날 때까지 하루도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무 부족함 없이 인기를 누리고 살아오던 내게 한 남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손을 들어올린 힘도 없이 시체처럼 흙바다에 누운 채로.

 닦아도 닦아도 내 눈에선 눈물이 멎을 줄을 몰랐습니다. 아마 그 순간 눈물샘 어디선가 실밥이 뜯겨져 버렸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해 아프리카에서 흘린 내 눈물만 다 모아도 에티오피아엔 가뭄이 없었을 것입니다.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이런 외침이 터져나왔습니다.

 “하느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른들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죠?”

위 글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오래된 미래펴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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