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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4. 왜 귀국했어요? [프레시안] 2006-7-19

[우리 곁의 재활병원] <4> ‘차라리 내가 병원을 짓고 말지’ 

2006-07-19 오전 9:18:51

 

이사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독일에 온 형님 부부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가 우랄산맥을 넘어 중국 베이징 상공을 지나자 서해안의 섬들이 작은 점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인천공항에 도착하겠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일깨웠다. ‘아, 얼마나 그리던 고국이었던가.’ 김포공항에서 출국했지만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인천공항 청사를 통해 입국하면서 새삼 3년 반이란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다. 공항에는 가족과 친구 등 2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삼 말이 필요 없는 만남이었다.

서울로 들어오는 차속에서 친척과 후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국과 독일은 장애인이 살기에 천국이라는데 왜 귀국했니?”, “형수님은 그곳에 사시는 것이 훨씬 좋으실 텐데요?” 갑작스런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을 떠나 외국에 산다는 것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이 있는 이곳이 나을 것 같아서….”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 후에 나는 사람들로부터 “왜 귀국했느냐?”, “이민 갈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병실이 없습니다”

 

귀국한 지 사흘 뒤 ‘한국병원에 입원해 재활치료를 계속 받으라’는 독일 주치의의 당부에 따라 의료진이 좋다는 국내의
한 재활병원을 찾았다. “병실이 없습니다. 일단 입원 신청을 하신 뒤 2~3개월 기다리셔야 합니다.” “네? 병원에 병실이 없다고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응급실도 아니고 일반 병실에 병상이 없다니.’ 주위를 둘러봤다. 나 혼자가 아니었다. 입원을 위해 전국에서, 혹은 서울의 다른 병원에서 찾아온 환자 가족들이 여기저기서 입원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내가 원무과 직원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2개월밖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병원에선 두 달만 되면 퇴원하라고 해요. 우리는 2년째 다른 병원을 옮겨 다니고 있어요. 다행히 석 달 전에 이 병원에 신청을 해서 입원할 수가 있어요.”

▲ 한국 재활병원에서 걷는 연습을 하며(2000년초). ⓒ프레시안

  충격이었다. 입사 초기 사건기자로 서울대병원과 경희대병원 응급실을 출입하며 많은 사건을 목격했다. 여름철 복 매운탕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 일가족, 떡을 먹고 급체해 숨진 할머니, 각종 대형 교통사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사고 등. 취재하면서 내가 매일 접했던 수많은 사건들은 나와 상관없는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불행은 내가 쓰는 기사의 소재였고 그들의 사연은 내 기사를 채우고 있는 스토리였다.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은 작품 ‘셀 수 없는 연인(ungezaehlte Liebe)’에서 ‘인간을 결코 숫자로 대상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은 내가 쓰는 기사의 대상에 불과했다. ‘불행은 늘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다’는 말이 사고를 당하고 나니 새삼 실감났다. 개인소득 2만 불, 교역량 11위의 경제대국에서 입원할 병실이 없어 유령처럼 전국을 떠도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내 병원들은 재활병동과 재활의학과를 개설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이유는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응급 환자나 외과 환자의 경우 각종 수술과 검진을 통해 높은 의료비를 받을 수 있지만 장애환자의 경우, 응급 상황을 거쳤기 때문에 병원에서 별로 해줄 것이 없었다. 싼 의료수가에 비해 물리치료나 작업치료 등 모든 것을 비싼 인건비에 의존해야 하는 재활병원은 적자투성이였다. 대표적인 민간 재활병원인 신촌 세브란스 재활병원은 매달 5억 원 이상의 적자가 나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이야 다른 병동에서 거둔 수익으로 재활병원의 적자를 감당할 수 있지만 다른 병원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구조였다.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서울대병원에서 조차 재활병동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 국립병원이 외면하는 상황에서 대기업이나 대학이 운영하는 병원이 적자가 불을 보듯 뻔한 재활병원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여기저기 쫓아다닌 끝에 아내는 2주일 만에 1인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며칠 후 보험이 적용되는 5일실로 옮길 수 있었지만 한국 병원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병원에서의 전쟁이 시작됐다. 말이 병실이지 5인실은 난민 수용소와 다름 없었다. 좁은 공간에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나 간병인 등 보통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24시간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밤낮으로 방문객이 끊이지 않고 병실 TV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왕왕거렸다. TV를 끄자고 제안했다가 “아저씨는 잠깐 병원에 계시지만 우리는 몇 년 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그 분노를 이해합니다만…”

▲ 휠체어를 탈수 있도록 설계된 일산 푸르메마을 집 ⓒ프레시안

오랜 병원 생활을 지친 환자 가족과 간병인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음식을 끊여 먹었다 이 때문에 병실에서 음식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환자들은 산책할 곳이 없어 병원 로비를 서성이고 하루 종일 창문에 매달려 지냈다. 복도와 로비는 늘 간병인과 방문객으로 넘쳐났다. 나와 아내는 사람을 피해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에 복도에서 걷는 연습을 해야 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오랜 병원생활로 인해 부모 자식과 형제 간에도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원수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많이 친절해졌다고 하지만 의료진이 해주는 것은 환자에게 주사를 놓아주거나 환자복을 전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든 것이 가족과 간병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측은 인력부족으로 절절맸다.

하루는 퇴근해 병실을 찾아가니 아내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재촉하자 아내는 결국 낮에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한 떼의 사람들이 병실로 몰아닥쳤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은 이들을 보자 무슨 대피 훈련하듯
불이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혼자 움직일 수 없었던 아내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고 한다. 잠시 후 10여 명의 교인들이 병실 한가운데서 엎드려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1시간 넘게 통성기도를 했고 난생 처음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아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괴성을 들어야 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안정이 필요한 아내는 충격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나는 원장실로 달려갔다. “오늘 병실에 교인들이 찾아와서 1시간 넘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왜 병원에서 제지하지 않습니까?”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방문객이 들이닥치고 어디 쉴만한 곳이 없으니 나을 병도 덧나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원장 선생님은 묵묵히 듣더니 말했다. “저도 선생님이 느꼈을 분노를 이해합니다. 제가 몇 년 전 부임했을 때 병원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0여 년간 미국병원에서 일하다 돌아온 그는 한국병원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 절감하고 구조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개인의 힘으로 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재활병원에 오려는 분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라도 치료받길 원합니다. 원장실이라도 개조해 병실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할 정도로 현실이 열악합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그나마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내의 옆 병실에는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계 대선배가 입원하고 있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수술을 받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뇌졸중의 후유증도 심했지만 ‘내가 왜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나?’하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하루는 그를 찾아가자 붙잡고 하소연했다. “당신 부인은 잘 지내죠? 나는 사는 게 말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병원에 쭈그리고 있어선 안 되는데….”

이 시간 편집국을 뛰어다니며 기사의 경중을 결정하고 후배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어야 할 그였다. 원고지 10장을 한 시간에 쓸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말술을 앞에 놓고 밤새 토론을 즐기던 그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부인과 간병인에게 늘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현실이 자신뿐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 누구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에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건강한 시절은 지나간 과거고 이제 정신을 차리시고 걷는 운동을 하시라”고 강조하면서 ‘내가 과연 그가 가진 고통의 절반이나 이해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준비 없이 한 순간에 맞닥뜨려야 하는 절망은 그토록 가혹한 것인지….

“차라리 우리가 병원을 하나 짓자”

▲ 장애인단체 사람들과 맥주파티 ⓒ프레시안

  하루는 입원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영국과 독일의 재활병원을 경험했잖아? 나중에 우리가 경험한대로 환자의 부름에 늘 응답하고, 환자를 인격체로 대하는 아름다운 병원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화답했다. “그래요. 정말 아름다운 작은 병원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게 꿈이 생겼다.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보살피는 병원, 콘크리트 고층빌딩에 환자가 갇혀 있는 병원이 아니라 마치 내 집 같은 목조주택에서, 푸른 잔디와 오솔길을 거닐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작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 길로 우리가 살던 시내의 아파트를 팔고 일산 외곽에 주택단지의 토지를 구입해 목조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성석동에
있는 푸르메 마을이었다. 마을길과 집 현관을 데크로 연결했고 집안의 문턱을 없애 훨체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 나는 장애인에게 편리한 집은 비장애인에게는 더 편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새롭게 출범한 아름다운재단이 가난한 이웃에 내 것을 나눔으로써 풍로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재단은 일반시민의 참여를 촉구하면서 기업과 언론을 상대로 여러 가지 의욕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나눔을 우리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이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 박원순 변호사님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참여연대를 취재하고 이곳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박 변호사님과 인연을 맺었다.

아내가 퇴원하자 우리 부부는 안국동으로 박 변호사님을 찾아갔다. “가족 모두 건강하시지요? 우리가 사고를 당하고 유럽 재활병원을 경험한 뒤 귀국해보니까, 우리 재활병원이 너무 열악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사업도 중요하지만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는 장애환자를 위해 재활전문병원 건립을 아름다운재단에서 추진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박 변호사님은 “아름다운재단이 배분을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병원건립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백 기자가 시간을 가지고 추진해 보세요. 내가 측면에서 적극 돕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나는 서울시와 보건복지부를 찾아다니며 병원건립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원, 즉 의료법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병원 부지와 건립비, 의료진이 확보되어 있어야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을 바꿨다. 의료법인의 전단계로 재단법인을 세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단의 주인인 재산과 그동안의 실적이 필요했다. ‘그래, 내가 재산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자면서도 창업을 구상했다.

“네가 신문기자인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 사고후 중국으로의 첫 외국여행(2006년). ⓒ프레시안

우연히 재정경제부 직원으로부터 소규모 맥주양조(마이크로브루어리)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허가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거다 싶었다.’ 독일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후배 방호권 씨가 “선배님! 한국에 가면 우리 프레미엄 맥주를 만드는 회사를 하나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생각났다. 방 씨는 뮌헨공대에서 맥주양조학 마이스터(전문양조사)와 디프롬 엔지니어(석사)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었다. CBS 경제부 기자였던 후배 이원식 씨(현 옥토버훼스트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이런 구상을 내비쳤다. 이 씨는 찬성이었다. 재단의 종자돈을 만들겠다는 내 목표와 제3의 맥주회사를 만들자는 이원식 사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만들겠다는 방호권 씨의 바람이 합해져 우리 세 사람은 맥주 사업에
뛰어들었다.

“경기도 안 좋은데 사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 네가 신문기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는데…”, “당신이 10여년간 글을 써 왔는데 갑자기 사업을 한다니 너무 큰 모험이에요.” 아버지와 아내가 눈물로 말렸지만 나는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이때부터 지인을 찾아다니며 ‘국내에 처음 도입되는 소규모 맥주사업이 리스크도 크지만 가능성도 있다’고 설득했다.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너 미쳤냐?’고 걱정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가능성 하나 믿고 투자한 선후배도 있었다. 이렇게 58명이 5000만원씩 모두 21억 원을 투자해 우리는 서울 강남역 인근에 국내 최초의 하우스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출발시킬 수 있었다.

맥주제조허가를 받기 위해 60여 가지의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말단 여직원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회사를 경영하고 직원들에게 월급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했다. 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아이템과 입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이다. 일에 대한 열정과 팀웍이 더 중요하다. 두 번째로 나를 믿고 아파트 전세금을 기꺼이 투자해준 선배부터 이 새로운 맥주 맛을 알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준 분들께 고개가 숙여진다. 사람들의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날마다 느끼면서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 처음 일을 벌였을 때 만류하던 분들도 이제 새롭게 평가할 때 자랑스럽다. 다행히 사업은 망하지 않아 강남점을 낸지 1년 만에 추가 투자를 받아 종로1가 청진동에 2호점을 낼 수 있었다.

이 때 가해자측 보험회사로부터 아내가 사용할 전동휠체어와 의족을 구입하기 위한 ‘우선피해보상금’ 1억 원이 도착했다. 나와 아내는 우선피해보상금 1억원과 내가 소유한 옥토버훼스트 지분을 기본재산으로 보건복지부에 재단설립허가를 요청했다. 재단 이름은 일산에 집을 지었던 장소인 푸르메마을에서 이름을 따 <푸르메재단>으로 했다.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