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섹션

[조선일보] 아내가 살아나서 고맙고, 의족으로 조금씩 걷는 것도 내겐 기적

[최보식이 만난 사람] “아내가 살아나서 고맙고, 의족으로 조금씩 걷는 것도 내겐 기적”

최보식·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재활병원 짓는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재활병원 짓기 위해 신문기자 그만두고 후배와 독일 맥줏집인 ‘옥토버훼스트’ 열어
해외연수 때 교통사고 입국해 재활병원 찾아도 “병실 없으니 기다려라” 한국 병원현실에 환멸
사고로 많은 걸 잃었지만 자신이 어려운데도 남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밤새 끙끙 앓는 아내를 지켜볼 때마다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우리 가족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았나’며 분노에 몸이 떨렸습니다. 사고를 낸 가해자의 이름도 아니까 총(銃)을 구해 찾아가서 정말 쏘고 싶었어요. 너도 똑같은 고통을 겪어보라며.”

백경학(46)씨는 장애인재활병원을 짓는 ‘푸르메재단’의 상임이사다. 그는 한때 기자였다. 한 사건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1998년 여름이었다. 독일 연수를 마치고 귀국 전에 마지막 가족여행을 떠난 길이었다. 그날 스코틀랜드의 한 소도시 칼라일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다섯살 난 딸애 용변을 보이고 속옷을 갈아입혀야 했어요. 시야가 탁 트인 오르막 갓길에 비상등을 켠 채 자동차를 세웠지요. 차 트렁크를 열고 속옷을 찾던 아내에게 자동차 한 대가 뒤에서 돌진해왔습니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아내를 치었고, 이어 저도 그 차 밑에 깔렸습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와 차를 번쩍 들어 저를 끌어냈어요. 아내는 다리에 많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당신 괜찮아, 정신 차려’ 본능적으로 고함을 쳤어요. 딸애는 튕겨져나간 우리 차의 창문에 매달린 채 울고 있었지요.”

구급차에 실리면서 그의 아내는 “난 괜찮아요. 민주(딸)가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라고 했다고 한다. 아내는 8시간의 응급수술을 받았다. 그 뒤로 혼수상태였다. 아내를 붙들고 흔들던 그는 그때야 아내의 왼쪽 다리가 절단된 걸 알았다.

“아내에게 다리가 없다는 걸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듯이, 본인은 ‘팬텀스 페인(phantom’s pain: 유령의 고통)’을 앓고 있습니다. 다리가 절단됐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다리가 아프고 발가락이 아픈 통증이 지금도 있어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런 상처나 고통을 안고 가겠지요.”

독일로 돌아와 혹독한 재활훈련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비명을 지르던 아내가 휠체어를 혼자 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혼자 평형대에서 걷는 연습까지 했다. 그의 가족은 1999년 말 귀국했다.

“재활환자는 집에 있으면 뼈가 굳어집니다. 그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면 복합 장애가 나타나고 신체 기능을 회복하기 어려워요. 같은 환자들끼리 얘기하고 운동하는 게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재활병원에서는 “병실이 없으니 일단 입원 신청을 하고 기다려라”는 답변을 들었다. 환자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현실이었다.

“아내를 겨우 입원시킨 뒤 난 이땅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6인실은 거의 난민수용소와 다름없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환자와 보호자, 간병인이 24시간 함께 생활하고, TV는 밤늦게까지 왕왕거립니다. 이마저 의료보험 적용이 한 병원에서는 두 달밖에 안 돼 병원을 옮겨다녀야 했지요. 유럽에서는 환자를 돌보는 것은 환자 가족이나 간병인이 아니라 의료진이었습니다. 내 손으로라도 제대로 된 재활병원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런 ‘마음’은 누구나 하루에 백 번 넘게 먹을 수 있지만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2001년 말 신문사에 사표를 냈다.

“막상 겁은 좀 났습니다. 내게 돈을 벌 수 있는 재능이 있을까. 기자 생활 10년을 사회부와 정치부에서 해 손익분기점이나 대차대조표도 몰랐어요. 독일에서 맥주양조 기술을 배운 후배와 ‘독일 맥줏집’을 내는 것이었지요. 동업한 또 다른 후배가 신문사 로비까지 찾아와 ‘오늘은 사표를 내라’고 계속 종용했어요. 2주쯤 망설이다가 사표를 냈지요.”

그때 이 사업에 58명이 평균 5천만원씩 내서 참여했고, 이듬해 여름 서울 강남역에 ‘옥토버훼스트’를 개점했다.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는“이상적인 재활병원을 꿈꾸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해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뭘 믿고 투자했을까요?

“친구와 선후배, 지인들에게 ‘맥주가 맛있어 가능성이 있다. 여러분이 투자한 뒤 고객이 돼서 주변에 선전하면 승산이 있다’고 한 뒤, ‘물론 최악의 경우 망할 수도 있다’고 했지요. 잘못됐을 때 돈만 잃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다 잃게 되죠. 그걸 떠올리니 밤에 잠이 안 왔습니다.”

그는 강남역 앞 점포를 내기 전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셌다고 한다. 인근 사무실 숫자와 거기서 버스 통학하는 지방대학이 몇 개나 있는지 등도 조사했다. 그리고 모 TV방송국에 ‘막걸리와 맥주, 순대와 소시지, 족발과 학세 등을 비교하는 프로를 해보자. 재료와 장소 모든 준비를 우리가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한 달 뒤 TV에 방영되기도 전에 이미 맥줏집은 입소문으로 만원이 됐다. 2호점 종로점, 3·4호점까지 연 상태다.

기자가 전직해 ‘사업가’로 성공한 아주 드문 케이스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사장직을 후배에게 넘겼다. 재활병원을 짓는 데 전념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맥줏집 지분 16% 중 11%를 재단에 넣었다. 2006년 교통사고 피해보상금을 받자 절반인 10억원도 재단에 내놓았다.

“사고 가해자는 우리 앞에 한 번도 나타나 사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소송은 8년을 끌었지요. 그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길 없었지요. 하지만 아내는 신앙이 깊어서인지 ‘그 사람도 평생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를 이해할 것 같다’고 했어요. 나는 ‘바보 같은 소리’라며 흥분했지만, 사실 그를 미워하니 내가 힘들어서 못 살 것 같았어요. 어느 날 아내에게 ‘이제 나도 용서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한 달쯤 지나 피해보상 합의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정말 거짓말 같았어요. 보상금은 아내의 것이지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 절반을 내놓아도 우린 살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말을 꺼냈지요.”

―본인은 재단에서 봉급을 얼마나 받습니까?

“재단에서 250만원, 맥줏집에서 판공비로 200만원 받습니다. 어제 보니 제 통장에 48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부인은 재단에서 일합니까?

“아내는 서울시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고 적극적인 여성이었지요. 하지만 자기는 ‘기부자’로 끝나야지, 행사 때 나오고 하면 마치 주인 같은 생각이 들 것이고, 그러면 재단이 공적인 조직이 아니라며 안 나오겠다고 합니다. 집에서 주로 책을 보면서 지냅니다.”

―이제 부인은 완쾌됐나요?

“아내가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작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후유증이 있습니다. 얼마 전 휠체어에서 일어나다가 넘어져 두 달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가끔씩 재활병원에 가서 자세 교정이나 의족이 맞는지 측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재활병원 입장에서 보면 아내는 ‘정상인’이지요. 더 심한 환자들이 많으니까요. 가령 척추환자가 볼 때는 말하고 손발 다 쓰고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절단장애인은 환자도 아닙니다. 척추환자는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도와줘야 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입장에서 보면 척추장애는 자기 할 말을 하고 손을 움직이지 않습니까. 재활병원을 만드는 게 절박한 일입니다.”

▲ 기자를 그만두고 독일 맥줏집‘옥토버훼스트’를 냈던 시절.

―그런 재활병원을 왜 당신이 지어야 합니까? 정부나 대형병원에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정부는 그런 계획이 없고, 대형병원은 적자가 예상되고 관리가 힘들어 안 하려고 하죠. 신촌세브란스의 재활병원만 해도 매달 5억원씩 적자를 봅니다.”

―그렇다면 재활병원을 당장 짓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적자를 면치 못해 과연 운영이 될까요?

“경기도 화성시에서 부지를 제공했고, 기업의 사회공헌기금과 기부금이 들어오고, 사명감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나선다면 환자 수의 절반쯤 무료로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정기후원자가 1000명쯤 되고 모두 37억원을 모았습니다.”

―교통사고나 뇌졸중 등으로 재활을 필요로 하는 환자는 매년 30만명쯤 발생합니다. 당신이 계획하는 재활병원의 병상(病床)은 150개인데 그걸로 무슨 표가 나겠습니까?

“비현실적이니까 포기하는 게 아니라, 한번 해보자는 겁니다. 의료운동 차원에서도 필요합니다. 실패할지 모르나 뭔가 자극을 줄 겁니다. 또 우리 재활병원에서 몇십 명이라도 치료를 받고서 정상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들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막상 일은 벌여놓았지만, 후회하고 마음이 바뀐 적이 없었습니까?

“병원 설립이 행정적으로 워낙 까다롭습니다. ‘짓기도 전에 이렇게 시달리는데 차라리 그 돈을 복지부에 반납해 어디 좋은 병원에 기부해달라고 하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죽으면 관(棺)을 어디서 사고 어떻게 들어가나’ 했던 그때의 막막함을 떠올리면 이런 것쯤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살면서 어느 순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나요?

“오지의 스코틀랜드 병원에서 아내가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뒤, 의사로부터 ’24시간 안에 죽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 ‘어떻게 숨진 아내를 한국까지 데려갈까. 앞으로 아이와 어떻게 살아갈까’ 캄캄했습니다. 애한테 아버지가 죽으면 영향이 덜 하지만, 엄마가 죽으면 손실이 훨씬 더 크지요.

그런데 아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겁니다. 그 뒤로 이렇게 생각이 바뀌게 됐죠. ‘사고를 안 당했으면 최고이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살아서 다행이다. 사고로 아내의 눈이 멀 수도 있었지만 안 그러니 다행이다. 의족을 차고 조금씩 걷는 연습을 하는 것도 기적이다’라고. 요것도 다행 조것도 다행이라며 나름대로 위안을 찾게 된 것이지요.”

―사고 후 가족 안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다리가 불편해도 장애인은 장애인대로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큰 부분을 잃었지만 아내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면이 많아졌습니다. 딸애에게는 ‘엄마 아빠가 항상 네 옆에서 지켜주지 못한다. 그때는 운이 좋아 살았지만 인생이란 언제든지 혼자가 되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혹한 얘기인지 모르나….”

―하루의 시작을 어떻게 합니까?

“아침 7시45분쯤 재단 사무실에 출근해 커피 한잔을 타서 사무실 앞 공원에 나가 모금에 관한 책을 30분쯤 읽습니다. 어떻게 모금할까를 많이 생각합니다. 올 연말까지 착공에 필요한 경비(350억원)의 절반을 모금해야 합니다.”

―장사도 아닌데, 모금에도 기술이 필요합니까?

“후원해달라면 대부분 ‘나중에 할게요’라고 답합니다. ‘나중에’는 대부분 이뤄지지 않습니다. 당장 매달 1000원이라도 해달라는 게 모금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 재단이 이런 일을 하고 있고 당신이 준 기부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환자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죠. 후원자는 그 주변에도 홍보를 할 가능성이 높아요.”

―세상을 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스코틀랜드에서 교통사고 직후 유학생이 영국 경찰로부터 소식을 듣고 3시간이나 차를 몰고 찾아왔어요. 처음 보는 청년이었지요. 나와 딸애는 병원에 붙은 가족호텔에 기거했는데, 그 뒤로 일주일에 한 번꼴로 김치와 불고기를 싸들고 찾아왔어요. 그 유학생은 귀국해 직장생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마움으로 쌀을 계속 보내줬어요. 보상금이 나왔을 때는 찾아가 1000만원을 드렸습니다. 사고가 난 뒤 만난 사람 중 90% 이상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사고로 시간을 잃었고, 자유를 잃었고, 아이는 충격을 받았지요. 대신에 자신도 어려운데 남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그는 우산을 폈다.

▲ 교통사고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재활병원을 짓는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최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