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흔한 실종

애간장이 마른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들의 단체 톡방에 자주 올라오는 긴급공지가 있다. 아이를 잃었으니 찾아달라고 하는 애타는 호소이다. 어느 때는 한 달에 몇 건씩 올라올 때도 있다. 그 간절함이야 말로 다하겠는가. 입술이 타들어가고 목구멍이 조이고 머리는 해머로 맞은 듯 멍하다. 마비가 된 듯 힘이 안 들어가는 다리를 억지로 놀려서 여기저기 헤매다 보면, 이대로 아이와 영 이별하는가 싶어 울음이 차오른다. 당장 저 귀퉁이 돌아서면 아이가 있겠지 했다가 힘이 빠지고, 저 모퉁이에서 아이가 튀어나오겠지 했다가 기운이 빠지길 여러 차례 하고 나면 온 몸에서 핏기가 다 사라지는 듯하다.



아이가 어미를 잃은 걸 알아차리고 집을 찾으려고 길을 헤맬 것을 생각하면 더욱 미치겠는 거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정신줄을 놓아버릴 지경이 된다. 애간장이 마른다는 게 이것이다. 입고 나간 옷과 가장 비슷한 옷을 입은 사진을 서둘러 찾아 여기저기 뿌리면서, 아래에다 이렇게 쓰며 울컥한다.

‘지적장애 몇 급,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함.’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같은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기 마련이다. 몇 번씩이거나 수도 없이 겪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러니 아이를 잃었다는 공지가 뜨면 금세 그 어미의 심정이 되어 버린다. 여름이라면 이 땡볕에 얼마나 힘들게 걸었을까를 생각하며, 겨울이면 이 추위에 어디서 떨고 있을까 생각하며 같이 애를 태운다. (그러고 보니 인간 오장육부 가운데 이 애간장이야말로 슬프거나 놀라는 마음이 깃든 곳이다. 알다시피, 중국 원숭이들의 마음은 창자에 깃든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랐더니 창자가 끊어져있더라는 데서 나온 고사가, 자식을 잃은 아픔, 곧 단장지통(斷腸之痛) 아니던가. 음, 그런데 왜 배를 갈라보았을까?)


대체 어디로 이끄는 걸까, 직진본능은


우리 아이들은 가끔 무슨 생각에서인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훌쩍 가버린다. 갑자기 그 곳을 떠나고 싶었을 수도 있고, 집이 있는 방향을 찾아갔을 수도 있고, 무언가 주의를 끄는 곳으로 가다가 그만 가족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서 그냥 쭉 걸어갔을 수도 있다. 직진하는 버릇이 있는 아이들도 많아서 CCTV를 보면 무슨 용무라도 있는 듯이 앞으로 가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동작이 너무 빠르고 조용해서, 마치 일부러 슬그머니 내뺀 것처럼 보인다. 보통 발걸음이 한 시간에 4킬로미터이니, 사방팔방 한 시간 단위로 퍼져나가는 거리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찾아달라는 공지가 올라오면 그때부터 우리들은 심난하다. 수시로 핸드폰을 열어보며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기다린다. 밤을 넘기게 되면 아이 걱정에, 그 아이 때문에 애간장을 태울 어미 걱정에 잠이 안 온다. 새벽에 일어나면 핸드폰부터 열어본다. 다행히 간밤에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올라있으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고 나면 저마다 아이 잃었다가 되찾은 경험담을 늘어놓는다.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니어서 몇 시간 동안이지만 아이를 잃었었고 그때 애간장이 바싹 타들어갔었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아이를 잃었다고 하면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아이고, 그 녀석. 또 어디론가 내뺐구먼. 어딘가 있을 테니 차근차근 찾아보세.”라고 애써 말해준다.


우리 아이들은 자꾸만 어디로 가는 걸까. 어미를 잃으면 제 삶도 어미의 삶도 사라져버리는데, 왜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걸까. 잠깐 깜빡했다가 문득 엄마를 찾아 나선 길이 점점 더 멀어지는 걸까. 그래서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열심히 걸어간 걸까.


아이 얘기는 아니지만, 지난 여름 우리 동네에서도 한 지적장애를 가진 아저씨가 실종되었다가 며칠 만에 돌아온 일이 있다. 구로동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가 사흘 만에 인천에서 발견되었는데, 행적을 추적할 수가 없었다. 중간에 어디서 주무셨는지, 무엇을 드셨는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발바닥이 다 헤져서 ‘너덜너덜’해지도록 직진만 했다. 발바닥이 그리 되도록 걸었으니, 그건 집을 찾기 위해 본능적으로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이토록 무심한 사회


이렇게 우리는 숱하게 아이를 잃어버린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 잃은 소식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참으로 의아하다. 우리 아이들은 가만히 보면 표가 난다. (물론 장애가족인 우리들은 ‘척’ 보면 안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행색이 티가 나기 마련이다. 자세히 보면 주변에 눈길 돌리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음악에 몰두한 듯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요상한 몸짓을 할 때도 있다. 가슴에 이름표를 차고 있을 때도 있고 주머니 속에 연락처 적은 쪽지를 넣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다. 길을 잃고 무작정 걸어가고 있는 모습은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걸 보지 못한다는 것은 무심하기 때문이다. 혹시 잠깐 ‘어라, 이상하다?’라는 느낌이 들었더라도 이내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귀찮아질까봐, 공연히 개입해야 할까봐 슬쩍 무시해버린 것이다. 이래서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리거나 결국 영 못 찾는 경우도 생긴다.



얼마 전에, 아이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한 엄마는 SNS에 이렇게 썼다. ‘오늘 저는 이 사회의 무심함에 정말 놀랐습니다. ○○이는 말도 어눌하고 누가 봐도 조금은 이상해 보였을 텐데 아이가 7시간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신발까지 벗어 들고 다녔는데 어쩜 아무도 연락을 안 해줬을까요? 목에 나비 목걸이도 있었는데….


외국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동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였으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동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누구도 우리 아이들의 이웃, 우리 아이들의 이웃아저씨, 아줌마, 형, 오빠, 언니, 친구, 동생이 되어주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때때로 발바닥이 헤지도록 걸어가고, 얼굴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도록 길을 헤매고, 영문도 모르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길거리 노숙자들과 함께 한뎃잠을 자기도 하는 것이다. 더 심하게는 염전노예니 오이밭노예니 하는 생활을 수십 년씩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웃이 되어주지 않아서 한 존엄한 인간의 삶이, 그를 잃은 어미의 삶이 물에 풀려버린 한지처럼 해체되어버리고, 바스러진 유리가시에 박힌 채로 비루한 숨을 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너무 쉬운 것 하나


오랜 세월, 장애를 가진 이를 차별하고 배제해왔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꽃은 무엇이든 곱고 나무는 무엇이든 아름답다. 새끼들은 무엇이든 귀엽고, 늙어가는 것은 짐승이든 나무든 무엇이든 품위 있다. 사람들만이 마치 사람이 제가 만든 공산품이라도 되는 듯이 규격과 품질을 얘기한다. 일정하지 않으면 이쪽 상자에 담기면 안 된다는 야멸찬 논리다. 사람이 사람을 기피하고 미워하는 나머지 눈앞에 안 보였으면 하는 이 저열한 병증은 언제 사라질 것인가. 아니 그럴 조짐이나 있는가. 사회구조적 변화와 개인의 결단이 모두 합쳐야 이뤄질 터인데, 그런 품위와 염치를 지닐 수 있는 건 꽤 품이 드는 일, 엄청난 공력이 드는 일이 될 터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돌파해나가며 살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낡은 편견, 저열한 혐오, 염치없는 배제와 기꺼이 맞서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주 쉬운 일이 하나 있다. 우리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이 그들의 인생 최초의 친구가 되는 일이다. 가족 외에 이웃의 친구를 사귀게 될 때부터 우리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하는 일이다. 사회의 재단을 받기 전, 아이들은 워낙 알록달록하기 마련이어서 장애니 비장애니 하는 구분도 그러한 알록달록의 범주에 들어간다. 혹시 어설픈 이질감이 발동해서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생길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아니면 조금의 도움으로 조화를 찾아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완전통합유치원을 다닌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공허한 희망이 아니라.)


이 집단 속에서 서로 섞여있는 것조차 모르게 자연스레 어우러지다가, 이 집단이 초등학생이 되고, 중고등학생이 되고, 어른이 된다면, 그런 사회가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아이를 길에서 잃지 않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들은 우리 아이들과 어울리는 자연스런 방법을 알 것이고, 어려움과 혼란에 빠진 것을 알아채고 눈치 있게 도와주는 매너를 익혔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인간이 서로 존엄하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이 사는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생각이라는 게 몸에 배어있는 아름다운 종족일 테니.


# 어김없이 추신

발달장애 아들을 두고 일찍 떠나야 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채비’가 상영된단다. 우리 자신이기도 한 이 엄마의 분투가 부디 성공해서 우리의 소원인 ‘편히 눈감기’가 영화 속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글= 김종옥 (서울장애인부모연대 동작지회장)










김종옥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김종옥은, 가끔 철학 인문학 관련 책을 쓰지만, 가장 쓰고 싶어 하는 SF소설은 아직 쓰지 못했다.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지역 내 마을사람들 일에 두루 참견하며 바쁜 척하고 지내고 있다. 쓰임과 즐김이 있는 좌파적 삶을 살고 싶어 하며, 매일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작> <처음 만나는 공자>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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