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인권, 어디까지 왔을까?

책을 통해 인권을 말하는 종로장애인복지관 ‘인생책방’


 


듣는 것만으로 설레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책방’도 그중 하나죠. 서점과 달리 오래된 책들이 가득 쌓여 있어 마치 보물찾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잖아요. 우연히 들어간 종로장애인복지관 홈페이지에서 ‘인생책방’이란 포스터를 봤습니다. ‘책방’이란 말에 눈길이 갔는데, 인생이란 단어에 또 한 번 설렜죠. 생각한 것과 달리 인생책방의 ‘인생’은 종로장애인복지관의 ‘인권생태계’팀을 줄인 말이랍니다. 장애인 당사자들이 모여 책을 통해 인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취지가 담겼죠. 더 흥미가 생깁니다.


장애인 당사자 인권 모임 ‘인생책방’


인생책방 3회차 모임 현장인생책방 3회차 모임 현장


인생책방 3회차 모임은 복지관 3층 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회원은 총 5명. 2회 모임 장소였던 삼청동의 노무현시민센터 북카페가 아주 근사했나 봐요. 이후 다시 가봤다는 회원도 있고, 그곳을 정기 모임 장소로 하자는 얘기도 나왔어요. 뒤이어 누군가 회식을 제안합니다. 겨우 세 번째 만남이지만 이들 사이엔 벌써 거미줄처럼 촘촘하면서 끈끈한 실이 이어진 것 같았지요. 


이정은 회원님이정은 회원님


이날의 책은 박노해 시인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담은 수필인 <눈물꽃 소년>입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회원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 책을 좋아한다는 이정은 님은 거의 다 읽어왔답니다. 이현종 님 역시 틈틈이 김지영 팀장과 만나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요. 그 덕분인지 두 사람은 이날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모임은 책과 영상을 통해 작가를 배우고, 책과 연관된 회원들의 경험과 의견을 공유하는 순으로 진행됐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눈물꽃 소년>박노해 시인의 <눈물꽃 소년>


인권 운동가 ‘박노해’를 만든 것


윤소미 회원님윤소미 회원님


작가의 본명은 박기평. ‘노동자 해방’이란 뜻인 ‘노해’라는 필명에는 노동자 인권 운동을 하다가 사형까지 구형받았던 작가의 삶과 의지가 담겼습니다. 인권을 말하는 ‘인생책방’과 아주 잘 어울리는 작가죠.


유소미 님은 시인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인지 자신은 마치 햇병아리처럼 느껴졌다고 말합니다. “책이 참 맑았어요. 시인의 천성이 그만큼 맑구나 싶었어요. 책 전반의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어요. 그가 외쳤던 혁명의 강함과는 전혀 달랐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첫사랑 민지에게 시를 보여줬을 때를 꼽습니다. “시를 읽은 민지가 ‘평아, 네 시는 참 슬퍼. 근데 울고 나면 맑아진다. 그래서... 네 시가 좋다. 평아, 넌 꼭 훌륭한 시인이 될 거야.’라고 하거든요. 그 말들 덕분에 작가가 시인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성일 회원님이성일 회원님


이성일 님은 자신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온 작가의 어린시절에 크게 공감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산동네였던 하월곡동에 살았어요. 그래서인지 촌동네에서 자란 시인과 비슷한 추억이 많았지요. 그때 나는 마냥 놀기만 했는데, 시인은 그 경험을 통해 성숙한 생각을 했다는 차이가 있네요.”


서로 다른 삶, 이어지다


“내가 말을 안하니까 듣지도 못하는 줄 알아... 살면서 제일 슬픈 건 내 마음속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거야” - 박노해 시인 <눈물꽃 소년> 중 -


박성홍 회원님박성홍 회원님


뇌병변장애를 가진 박성홍 님은 발음이 어눌해 입을 잘 열지 않았던 연이 누나의 에피소드 부분을 펼칩니다. 연이 누나는 작가인 평이에게 처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요. “저도 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보니 어릴 때 연이 누나와 비슷한 경험이 많았어요. 그래서인지 그 부분을 읽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이현종 회원님이현종 회원님


현종 님은 작가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부분에서 얼마 전 돌아가진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생각나 슬펐다고 말합니다.


김지영 종로장애인복지관 인권생태계팀장김지영 종로장애인복지관 인권생태계팀장


냄새나고 ‘만년 꼴찌’, ‘불우 소년’인 광선이와 짝꿍이 된 것은 내내 마음이 까사로왔기 때문이다. 공소에서 기도할 때 ‘평아, 지금 니는 어느 짝꿍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냐. 나는 여그 고아와 병자들이 굶주린 자들 곁에 짝꿍으로 앉아있는디...’ 그런 소리가 울려와 나를 못살게 했기 때문이다. - 박노해 시인 <눈물꽃 소년> 중 -


김지영 팀장은 ‘그날 소년 졸업하다’ 에피소드를 읽으며 자신의 학창시절이 생각났다고 말합니다. “동생이 장애가 있어선지 자연스럽게 장애를 가진 친구와 짝을 했어요.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마저 그 아이를 많이 놀렸지요. 나서서 말리진 못했지만 그 상황이 참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성장하면 누군가를 돕기 위해 큰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일에 치여 너무 작은 김지영이 됐어요.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참 이상하고 눈물이 났어요.”


이에 성홍 님이 “누구라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고 얘기하자 여기저기서 “나도 울었다”며 공감의 말을 건넵니다.


“장애인 인권이 많이 높아진 것을 느껴요.” 


회원 대다수는 최근 장애인 인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젊을수록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는 데 모두가 공감합니다. “과거에는 아침에 장애인이 방문하면 재수 없다고 했어요. 요즘 청년들을 개인적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장애인도 하나의 개인으로 존중한다고 느껴요.


이 모임을 통해 좋아하는 책을 더 다양하게 읽을 수 있어 좋다는 회원도 있고, 30년 만에 책을 읽게 됐다는 회원도 있습니다. 혼자서는 완독이 쉽지 않았는데, 함께하며 책 읽는 재미를 느끼게 된 회원도 있고요. 가장 좋은 건, 좋은 사람들과 다양한 삶을 경험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지영 팀장은 “인생책방에서 인생의 원래 의미는 인권생태계지만, 책을 통해 우리 인생을 돌아본다는 의미가 더해진 것 같다”며 “회원들이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을 돌이켜 공감하며 좋은 관계를 오래 이어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발달, 지체, 뇌병변 등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이 서로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고 깊이 공감하며 어쩌면 치부일 수 있는 자신의 내밀한 삶도 기탄없이 나눈 시간. 다소 엉뚱한 말에도 호응해주며 그 주제에 맞춰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참여하기 전에는 장애 유형별로 나눠서 운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깊은 존중과 배려 속에서 느낀 그 날의 충만한 행복과 설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다름을 핑계로 나누지 않고 개개인을 존중하며 각자의 권리를 지켜준 그 자체로 ‘인생책방’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글, 사진= 지화정 과장 (마케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