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누구나 벤치

 


모두를 위한, 누구나 벤치모두를 위한, 누구나 벤치


지난 4월 17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서울 여의도공원에 첫 번째 ‘누구나 벤치’가 설치되었다. 누구나 벤치? 누구나 앉을 수 있는 벤치라는 뜻일 텐데, 공원 벤치는 원래 누구나 앉을 수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당연히 공원 벤치는 공공의 시설물이기에 앉는 사람을 제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벤치’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해 제작된 벤치다. 장애인의 생활 편의성과 공공시설 접근성을 높이는 ‘장애인 일상 변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기획되었다.


‘누구나 벤치’ 사업이 시작된 건 2022년 12월이다. 현대제철이 임직원 매칭 기부로 조성한 기금의 사용처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다소 특이한 아이디어가 거론되었는데, ‘현대제철의 철 소재를 활용한, 유니버설(배리어프리) 제작물을 만들어 보급해보는 건 어떠한가’라는 내용이었다. 벤치, 그네, 이동 경사로 등 다양한 아이템이 예시로 나왔다. 그동안 우리 팀이 해온 일은 장애 당사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의료비나 재활치료비 등을 직접 지원하는 일이었기에, 만약 유니버설 제작물로 사용처가 결정된다면 우리에게는 새로우면서도 몹시 힘든 도전이 될 터였다.


현대제철 임직원의 기부와 투표로 시작된 '누구나 벤치 프로젝트'현대제철 임직원의 기부와 투표로 시작된 '누구나 벤치 프로젝트'


기금 사용처는 현대제철 임직원의 투표로 최종 결정될 예정이었다. 수년에 걸쳐 여러 기업과 지원사업을 진행해온 팀원들은 현대제철 임직원이 치료비 지원 같은 직접지원 사업을 선택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벤치 같은 아이템은 아직 다수의 공감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 놀랍게도 누구나 벤치가 1위를 차지했다.


갑자기 벤치 제작이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 다른 단체나 지자체 등에서 진행한 공모전 형식의 유니버설 벤치 사업 사례를 찾아봐도, 수상작만 있을 뿐 실제로 제작되어 보급된 경우는 없었다. 그 말은 상용화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 아닌가!


일단 벤치를 만들려면,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 ’누가 디자인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한참 고민하던 중에 평소 즐겨보던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님의 유튜브 채널에서 ’벤치‘를 강조하던 콘텐츠가 퍼뜩 떠올랐다. 해당 장면을 찾아 캡처하고, 누구나 벤치 사업의 필요성과 대략적인 계획을 담은 제안서를 만들면서 초반부에 캡처 화면을 삽입했다. 워낙 유명하고 바쁜 분이기에 받아줄지 알 수 없었지만, 유현준 교수님에게 제안서를 보내보기로 결심했다. 겨우 알아낸 메일 주소로 제안서를 보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유현준 교수와 함께 회의하는 모습유현준 교수와 함께 회의하는 모습


며칠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교수님께서 직접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합니다.” 최근 몇 년간 가장 기쁜 전화가 아니었나 싶다. 회의를 앞두고서는 관련 공부를 많이 했다. 서울시청 홈페이지에서 유현준 교수님이 참여했던 ‘강남구 테헤란로 벤치 공모전’의 자료까지 뒤져봤다. 우리의 사업 취지를 설명하고, 유현준 교수님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기쁘게도 유현준 교수님이 디자인 및 디자인 감리까지 해주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사업의 9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이 나오면 그대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진짜 난관은 그때부터였다.


벤치 디자인은 착착 진행되는데, 설치 장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유동인구가 많은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또는 고궁 같은 관광지에 설치하고 싶었다. 재단 산하의 복지관이라면 쉽게 설치할 수 있겠으나, 되도록 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열린 공간에 설치하여 사업의 필요성과 취지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시청, 구청, 교육청, 지하철공사 등의 홈페이지 주소록을 뒤져가며 수없이 많은 전화를 걸었지만, 긍정적인 회신은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설치 불가”, “우리 업무가 아니니 OO부서로 연락해 봐라”, “…… (한숨)”의 반복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벤치가 만들어졌는데 설치할 곳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큰 창고에 일단 보관해야 하나? 그것도 다 돈 드는 일일 텐데?'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서울시청에 다시 한번 문의하기로 했다. 시청 홈페이지에서 담당자 업무 현황을 띄워놓고 매달릴 곳을 찾았다. 유니버설 부서는 이미 물어봤으니 패스하고, 시청광장이나 광화문 광장 쪽 담당부서에도 물어봤고, 도로 점유 관련 부서, 장애인 복지 부서, 장애인 정책 부서… ‘정말 접촉 안 해본 곳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장애인자립지원과’에서 경사로 지원사업을 하는 담당자가 눈에 띄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경사로=이동편의시설=유니버설(배리어프리) 디자인=누구나 벤치가 아닌가! 우리 사업이랑 찰떡이네.’ 일단 전화부터 하고, 메일 주소를 받아 제안서를 보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직접 만나서 들어보고 싶다”는 회신이 왔다. 서울시청으로 찾아가 사업 진행 경과를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2024년 2월, 서울시청에서 뜻밖의 제안이 왔다. 4월에 열릴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서울 여의도공원에 누구나 벤치 1호를 설치하고, 오세훈 서울시장님과 함께 세레머니를 하자는 얘기였다. 이후 시청을 통해 각 구청의 수요 조사를 진행했고, 약 30개소의 추가 설치 장소까지 확보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 말은 진짜였다.


지난 4월 17일 서울 여의도공원에 1호 누구나 벤치가 설치됐다. 오세훈 서울시장 및 유현준 교수, 현대제철 최상건 전무님이 참석한 행사도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서른 곳에 누구나 벤치를 설치하는 일이 남았고, 이 사업은 2차년도를 향해 새롭게 출발할 예정이다.


여의도공원에 설치된 첫 '누구나 벤치'여의도공원에 설치된 첫 '누구나 벤치'


누구나 벤치는 주변 환경 속 이질감이 없이 자연스럽다. 또한 적은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에 많이 생산하여 여러 곳에 설치할 수 있다. 보급 및 상용화가 그만큼 쉽다는 뜻이다. 팔걸이가 없어 장애인-비장애인 간 물리적 벽이 없고,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높이에 가방고리 및 컵홀더 공간을 마련해 편의성을 높였다. 벤치를 이용하거나 바라볼 때 휠체어 공간이 자연스럽게 눈에 띈다. 휠체어가 없이 비어있더라도, 그 공간이 누구를 기다리는 공간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소셜믹스는 상대방의 배경이 어떤지 모르는 ‘익명성’의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도시 공간 속에서 익명성의 소셜믹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가 공원, 벤치, 도서관이다. 이런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면 소셜믹스가 된다.
- “공간의 미래” 中(유현준, 을유문화사)-



공간의 미래. 이 새로운 벤치가, 조금은 다른 미래를 가져다주기를 기대해본다. 일단 밖으로 나와, 함께 앉는 것이 소셜믹스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글= 도동균 과장(기업협력팀)
*사진=도동균 과장, 푸르메재단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