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메치과를 떠나보내며
푸르메치과 사업종료
감사패를 받은 푸르메치과 직원들
푸르메재단의 처음을 열어준 곳, 지난 2007년 개원해 17년간 장애인과 지역주민의 구강건강을 보살폈던 푸르메치과가 2024년 2월 29일 진료를 끝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지난 28일, 치과의 마지막을 지켜준 직원들에게 고마움, 미안함, 아쉬움 등이 혼재된 마음을 담아 감사패를 전달했습니다.
푸르메나눔치과는 “이가 아파 먹지를 못한다”는 한 중증장애인의 간절한 호소에 문을 연 민간 최초의 장애인 전문 치과입니다. 치과의사의 자원봉사와 각 기업, 시민들의 도움으로 2007년 7월 종로구 신교동의 소방서 옆에 진료용 체어 2대를 놓고 시작했지요. 장애인 환자를 받아주는 치과가 없는 탓에 치료를 받지 못해 제대로 먹을 수 없던 장애인 환자들이 전국에서 몰려왔습니다. “부산, 광주, 목포 등 전국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오고, 제주도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와 오픈 시간 전부터 줄을 서 계셨어요. 2~3달씩 대기해야 할 정도로 늘 붐볐어요.”
2007년 푸르메나눔치과 개원식 당시 정희경 치과위생팀장(가운데)
개원과 함께 입사한 정희경 치과위생팀장은 17년이나 지난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치과의사들이 돌아가며 무료 진료를 해주셨어요. 기공소며 재료상도 아주 저렴하게, 때로는 무상으로 물품을 공급해줬어요.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한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기부해주셨고요. 그런 도움 덕분에 장애인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절반만 받고도 운영할 수 있었어요.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아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요? 그간 푸르메치과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장애인 환자는 크게 줄었고, 비장애인 환자를 같이 받아도 적자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 살림을 꾸려나가는 푸르메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일이지만, 뒤집어보면 그만큼 장애인들이 갈 수 있는 치과가 늘었다는 뜻이니 한 편으로는 좋은 소식이지요. 2008년 권역별 장애인구강진료센터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2009년 전남에 최초 장애인구강진료센터 선정, 현재는 전국 14개 권역센터가 설치 예정 및 운영되고 있습니다. 뒤이어 대학병원들이 나서고, 여러 치과에서도 장애인 환자를 받기 시작하면서 푸르메치과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입니다. 푸르메치과는 ‘장애인의 구강건강을 보살피며, 장애인 치과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했습니다.
(왼쪽부터) 정희경 치과위생팀장과 백한승 원장
치과는 문을 닫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켜켜이 쌓아온 17년의 이야기는 추억으로, 그리움으로 오래 기억될 겁니다. 얘기하고 또 얘기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정희경 치과위생팀장과 백한승 원장의 인터뷰처럼요.
정희경 치과위생팀장 ‘나를 치유한 환자’
대형병원 치과에서 이곳으로 온 정희경 팀장에게 푸르메치과는 여느 곳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답니다. “환자를 대하는 제 태도는 늘 같았는데, 푸르메치과 환자들은 제 손을 부여잡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정말 고마워하셨어요. 전에는 받아보지 못했던 진심 어린 마음이었죠.”
직업적으로, 넓게는 인생 전반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준 귀한 인연도 만났습니다. “치아가 다 망가지면서 식사를 제대로 못해 뼈만 앙상했던 중증 뇌성마비 환자였어요. 치료비 70%를 지원받아 틀니를 하셨어요. 오실 때마다 제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네셨죠. 이상하게도 제가 힘들 때마다 그 분이 방문하거나 전화하셨는데, 정말 몸과 마음이 힘들던 어느 날 그분의 감사 인사를 받고 종일 울었던 적이 있어요. 그러고 나니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어요. 하늘에서 절 위해 보내준 천사라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환자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달라졌어요.”
백한승 원장 ‘푸르메이기에 할 수 있었던 것들’
정희경 팀장과 푸르메치과의 마지막을 함께한 이는 2015년 푸르메치과에 입사해 2016년에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치과 시스템을 구축한 백한승 원장입니다. “개인 치과 개원을 준비하던 중 푸르메치과에서 치과의사가 필요하단 얘기를 듣고 한 달 만에 결정해서 여기로 왔어요. 일단 푸르메치과가 집에서 가까웠고요(웃음).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어요. 좋은 일도 할 수 있으니 1석 3조였죠.”
백 원장에게 푸르메는 장애인 환자에게 최적의 치과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큰 병원의 장애인 치과 시스템을 구축해보는 일은 정말 뜻깊은 일이었어요. 당시 가장 신경 쓴 것이 전신마취 시설이었어요. 강직이 심한 뇌병변장애나 발달장애 환자 상당수는 전신마취 없이 치료가 불가능한데 비싼 기계값에 입원실과 심전도검사도 갖춰야 하고, 낮은 의료수가로 전신마취 한 번 할 때마다 적자가 나니 시설을 갖춘 곳이 거의 없어요. 푸르메병원이었기 때문에 500번이 넘는 전신마취 치료를 할 수 있었어요.”
2015년 종로 푸르메치과에서 그는 치과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되찾아준, 잊을 수 없는 환자를 만났습니다. “척추강직증으로 허리가 90도로 굽어 한 손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늘 입을 가리고 다니던 환자였어요. 균형 잡기가 힘들다 보니 앞으로 고꾸라져 이가 다 깨졌는데 치료해줄 치과를 찾지 못해 이가 다 썩고 구취가 심했어요. 몸을 눕히지 못하는 터라 제가 허리를 잔뜩 꺾어 힘든 자세로 깨진 이를 다 뽑고 임플란트 시술을 했지요. 그때부터 그 분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원래 직업이었던 영어강사 경력을 살려 공부방 운영도 하게 되셨어요. 그 수익으로 기부도 하셨고요. 그 환자를 통해 제가 여기서 일하는 목적을 다시금 깨달았어요. 장애인 치료의 목적은 단순히 치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푸르메치과의 여정은 끝나지만···.
푸르메치과는 갈 곳 없는 장애인 환자들에게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습니다. 장애인 치과치료 환경이 크게 개선됐음에도 정희경 팀장이 걱정을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대부분 비용이 비싸고, 예약도 쉽지 않은 데다가 대기기간도 길어서 접근성이 떨어져요. 발달장애나 뇌병변장애 환자들이 여전히 푸르메치과를 다닌 이유죠. 이들이 편하게 갈 수 있는 민간 주도의 치과가 더 많아져야 해요.”
백한승 원장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 치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정책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음식을 씹지 못하던 사람이 씹게 된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먹는다는 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임에도 그래요. 그런 인식이 보험 수가에도 반영돼 있어요. 장애인 치과 치료가 비장애인에 비해 인원, 시간, 난이도 등에서 4배 이상 차이가 나는 반면 보험수가는 그걸 반영해주고 있지 않아요. 들어가는 비용은 훨씬 큰데 진료비가 비슷하면 어떤 치과에서 장애인 환자를 받고 싶겠어요?” 결국 장애인 환자들을 위해 현행 제도는 개선돼야 할 겁니다.
그때까지 백한승 원장은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요즘 진료와 함께 구강세균 관련 연구를 하고 있어요. 구강 내 세균의 균형을 맞추면 치주염을 예방할 수 있는데 집에서도 손쉽게 검사할 수 있도록 하는 테스트기를 개발하려고 해요. 이 키트가 나오면 외출이 힘든 중증장애인들의 잇몸병을 예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푸르메치과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만, 장애인들이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의료 환경을 개선하고 장애인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푸르메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백한승 원장, 정희경 치과위생팀장과 더불어 17년간 푸르메치과와 장애인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함께 했던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찾고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내 치과는 계속 운영됩니다.
*글, 사진= 지화정 과장 (마케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