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이철수 화백과의 우중한담(雨中閑談)

많은 비가 쏟아지던 18일 판화가 이철수 화백을 만나러 충북 제천으로 향했습니다.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천등산과 울고 넘는 박달재 사이에 이철수 화백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대문 앞에서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이 화백 집은 생각보다 넓었습니다. 곱게 자란 잔디는 잘 다듬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연못과 조선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줬습니다.대화를 나눈 곳은 작업실입니다. 고은 결이 드러난 나무 작업대 위에는 관련 책자와 습작 등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최고 판화가의 작업실을 구경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질박하면서도 짙은 감성이 묻어나는 작품들이 태어난 곳 답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업대 곳곳 패인 자국들은 작품을 내놓기까지 겪었을 ‘산고’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이철수 화백이 읽고 있는 책들은 미술서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와 문학 분야 등으로 다양했습니다.이철수 화백 부부는 22년 전 이곳 제천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손수 일구는 논과 밭이 2천여 평이나 됩니다. 요즘 들어 작품활동에 농사일까지 눈코 뜰 새가 없다고 합니다. 작가의 작품세계의 근원이 바로 농촌과 자연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부인 이여경 여사는 모든 것을 자급 자족할뿐더러 수확한 작물들을 절대 팔지 않는 대신 필요한 사람이나 단체에 준다고 강조합니다.“한참 전에 추수한 농작물을 팔아 2만5천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허탈하던지요. 내가 이 돈을 받으려고 이 아까운 곡식을 팔았구나 하고 속이 상해서 그 돈을 아직도 장롱 속에 넣어두고 있어요.”부부가 참 부지런하고 닮았습니다. 아침 5시 반이면 벌써 일어나 농사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고추를 따고 깨를 털고, 토마토 대도 세우고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하루를 보낸다고 합니다. 집 앞에 펼쳐진 이 화백의 논에는 우렁이농법으로 길러진 벼들이 벌써부터 가을을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이 부부에게 제천은 제2의 고향입니다. 두 남매 모두 이 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삶이 행복해서 이곳을 지키고 있지만 요즘 부쩍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요즘 그 누구도 농업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적다고 이 여사가 한탄하십니다. 마을 역시 60대 노인들이 청년으로 불릴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농업의 미래, 우리의 미래가 너무도 걱정된다고 이철수 화백 부부는 강조합니다.이철수 화백은 푸르메재단이 앞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해주길 기대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장애인들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충실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재활전문병원 건립에 뜻을 함께 하시겠다고 말했습니다. 연말이나 내년 봄 민정기 화백과 석창우 화백 등 장애인 작가와 비장애인 작가와 함께 공동 전시회를 열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에 흔쾌히 응답을 해주셨습니다.이 화백 부부가 키우신 옥수수를 먹으며 ‘아름다운 농촌생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두어 시간이 흘렀습니다. 폭우를 뚫고 이 화백 댁을 찾아 갈 때와 다른 흐뭇함이 밀려왔습니다. 따듯해진 마음으로 이철수 화백의 집을 나서자 어느덧 비가 그쳐 있었습니다. 서울로 되돌아오는 시간, 아마 ‘순수한’부부는 밀린 일감을 찾아 바짓단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글=임상준 푸르메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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