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발달장애인 예술가의 포용적 동반자, 캐나다 ‘비쿠냐 아트 스튜디오’
- 발달장애인 예술가의 포용적 동반자, 캐나다 ‘비쿠냐 아트 스튜디오’
[푸르메재단의 같이 살기] 장애를 ‘다름’으로 인정하고 경제적 자립도 지원
장애인 예술가 린지 앤더슨이 2019년에 그린 작품 ‘스프링 러시(Spring Rush)’(왼쪽)와 ‘라이츠(Lights)’.
푸르메재단 제공
발달장애인 린지 앤더슨 씨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여럿이 참여하는 미술 프로그램에서는 소극적이었다. 떨리는 손이 부끄러워서였다. 앤더슨 씨를 유심히 관찰하던 한 사람이 프로그램 참여자들에게 외쳤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몸 어딘가를 떨게 되죠. 우리 함께 손을 떨어보는 게 어때요?”
이곳에서는 아무도 앤더슨 씨의 약점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앤더슨 씨의 손 떨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함께하겠다고 했다. 이 말은 앤더슨 씨의 두려움을 녹였다. 그리고 그의 손 떨림은 독특한 화풍으로 승화됐다. 2019년 그가 그린 작품 ‘스프링 러시(Spring Rush)’와 ‘라이츠(Lights)’에는 그 고유한 화풍이 잘 드러나 있다.
앤더슨 씨의 이야기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메이플리지에 자리한 ‘비쿠냐 아트 스튜디오’(Vicuña Art Studio·이하 아트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함께 손을 떨어보자”고 제안한 사람은 이 아트 스튜디오의 비장애인 직원이었다.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아트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내부에는 형형색색의 미술용품과 그림, 도예 작품이 가득했다. 청년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각자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던 손 떨림이 자신만의 화풍으로
비쿠냐 아트 스튜디오는 발달장애가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관이다. 장애인의 재능과 창작 활동에 관심 있는 그래픽디자이너 마리아 데일리 씨가 2008년 설립했다. 현재는 지역사회 장애인 지원 기관인 ‘리지 메도 커뮤니티 생활협회’(Ridge Meadows Association for Community Living·RMACL)가 데일리 씨로부터 아트 스튜디오를 넘겨받아 협회의 주간 활동 프로그램 중 하나로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 예술가 60여 명이 이곳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트 스튜디오는 발달장애인 예술가들에게 창작 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캔버스, 페인트, 붓 등 미술 도구도 아낌없이 지원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전문 미술교육도 실시한다. 타인의 작품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이에게는 다양한 자료를 보여주면서 자기만의 화풍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아트 스튜디오 디렉터인 단하 리 씨는 “이곳에서는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는다”며 “강사들은 작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묻고 그들과 함께 탐구하는 동반자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아트 스튜디오의 장애인 예술가들에게 미술을 지도하고 있는 데일리 씨는 “재능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과 관찰,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트 스튜디오는 지원하는 예술가들의 나이와 활동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데일리 씨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장애인 지원 서비스가 대부분 특정 연령대나 일부 기간에 집중되는 것과는 차별화된다. 그 덕에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속도와 방식으로 창작을 이어간다.
비쿠냐 아트 스튜디오의 한 장애인 예술가가 작업 중인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푸르메재단 제공
판매 수익 60% 예술가에게, 40%는 운영비로
아트 스튜디오는 장애인 예술가가 일자리를 얻어 경제 활동을 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장애인 예술가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연 3회 전시회를 열어 장애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데, 판매 수익의 60%는 작가에게 돌아간다. 나머지 40%는 재료비 등 아트 스튜디오 운영비로 쓰인다. 이는 예술가들에게 성취감과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다. 조사단이 방문했을 때도 아트 스튜디오 내 전시 공간에 1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예술가들의 활동은 아트 스튜디오 안에 머물지 않는다. 일례로 아트 스튜디오는 2023년 지역 내 유명 카페 ‘원스 어폰 어 티 리프(Once Upon a Tea Leaf)’와 협력해 작가들의 그림으로 크리스마스 선물 세트 포장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 상품은 빠르게 품절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아트 스튜디오는 장애인의 ‘고용’과 ‘자립’이라는 성과 중심의 목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자기표현’과 ‘성장’에 집중하는 지원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일깨워준다. 이곳에서 예술은 단순한 기술이나 취미를 넘어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포용의 언어’다.
한국의 장애인 주간 활동도 정해진 활동을 돌아가면서 반복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개인이 원하는 특정 분야의 활동을 평생에 걸쳐 할 수 있는 ‘포용적 활동’으로 거듭나야 한다. 비쿠냐 아트 스튜디오가 예술을 통해 실현한 포용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도 확산하길 바란다. 예술이 평생의 친구가 되고, 사회가 포용의 캔버스가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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