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푸르메재단·병원·농장 이어 '마을'…장애인을 위한 꿈은 계속 된다

푸르메재단·병원·농장 이어 '마을'…장애인을 위한 꿈은 계속 된다

2023-09-11

 

[함께 만난 사람]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1%의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처럼 그날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는 25년 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머뭇거렸다.

 

유럽 타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 두 달간 혼수상태로 있던 아내가 깨어날 확률, '기자와 경찰관은 사업을 하면 망한다'를 뒤엎고 사업에 성공할 확률, 다국적 보험회사를 상대로 피해보상금을 받을 확률, 사회각계의 도움으로 장애인이 된 아내와 약속한 '아름다운 재활병원'의 기틀이 갖춰질 확률, 출퇴근길 '재단' 간판을 본 한 사업가가 수십 억원을 기부할 확률,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감동을 받은 또다른 사업가가 수백 억원을 기부할 확률, 장애 아들을 둔 부모가 자신의 토지를 기부해 장애인 자활의 토대가 될 확률 등 이 모든 1%의 우연과 필연이 쌓여 푸르메재단과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푸르메스마트팜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백 상임이사의 인생을 '역전 드라마'라고 할 지 모르지만, 정작 드라마의 주인공인 그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다.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위한" 꿈.

 

"하느님께서 내 아내에게 죽을 듯한 고통을 주시고, 그 고통 속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게 하신 것은 아마도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 그 길을 걷게 하려 하심이 아니었을까."(책 <효자동 구텐백>(백경학 지음, 푸르메 펴냄) 82쪽)

 

꿈꾸기 좋은 9월의 어느 날, 전홍기혜 이사장과 함께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있는 푸르메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프레시안(이명선)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프레시안(이명선)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리도록 사회변화를 선도한다

 

전홍기혜 : 전문재활병원 건립을 목표로 재단을 설립한 이래,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다고 보나?

 

백경학 : 장애에 대한 편견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바뀐 것 같다. 길가에 턱이 없어지고 엘리베이터도 생기는 등 인프라도 늘어났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보면, 장애인이 일할 수 있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장애인의 자활과 자립에 관해서는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전홍기혜 : 코로나19 기간 동안 발달장애인의 돌봄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자식을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부모도 있었다.

 

백경학 : 코로나19를 겪은 2년 반, 약 30개월 동안 20여 명이 넘는 발달장애인 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발달장애인의 2분의 1이상(53%)은 하루 12시간 이상, 4분의 1이상(26%)은 20시간 이상 도움이 필요하다.(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조사)

 

코로나19 전에는 발달장애인의 활동지원서비스가 이뤄져 가족들 숨통이 조금이라도 트였지만, 코로나19 기간에는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립됐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가족이 다함께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린 것 아닌가 싶다.

 

푸르메재단의 목표가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리도록 사회변화를 선도한다'이다.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하는 것들, 복지, 교육 등. 조금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늘 존재하는 것 같다.

 

1. '불행'이란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단어였다. '꽝' 하는 굉음이 나기 전까지는…

 

백 상임이사는 '총보다 펜의 힘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기자가 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기자 생활을 한 199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은 국내외 할 것 없이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중국 천안문 사태, 걸프전, 월드와이드웹(www) 등장, 신자유주의 도래, 세계무역기구 출범,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기자가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테니 '통일 전문성'을 갖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독일에 대해 고민하며 독일어 공부를 했다. 그렇게 1996년 7월 뮌헨 대학으로 연수를 갔다."

 

백 상임이사는 "아침 일찍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강의가 끝나면 아내와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 공부를 했다. 주말이면 유학생들을 초대해 맥주 파티를 열기도 했고 벼룩시장을 다니기도 했다. 더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불행'이란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단어였다. 귀국을 한 달 남겨놓고 떠난 영국 여행에서 '꽝' 하는 굉음이 나기 전까지는….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비상등을 켜고 길가에 차를 세웠는데, 아내가 필요한 물건이 트렁크에 있다며 차 뒤쪽으로 갔다. 일순간 '꽝' 하는 소리가 나더니 피가 흥건했다. 아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10시간 뒤, 아내는 다리가 잘린 채 혼수상태로 수술실을 나왔다. 의사는 출혈이 심해서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백 상임이사의 삶은 30% 이상 손상된 아내의 뇌기능처럼 한순간에 멈췄다. '아내의 시신을 수습해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체중은 48kg으로 떨어졌다. 주치의마저 "당신 부인만큼 이 병원에서 위독한 환자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런던의 한인 성당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유럽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시간을 정해 아내의 소생을 간구하는 미사를 일제히 올렸다.

 

그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과 교인들의 기도 때문이었을까. 희망이 없을 것 같던 아내에게 기적이 일어났다."(위의 책, 29쪽)

 

2. 장애인이 된 아내와 '아름다운 재활병원'을 꿈꾸다

 

2년을 계획한 해외연수였지만, 백 상임이사는 아내의 사고로 3년 반 만에 귀국했다. 그러나 막상 귀국해 보니, 한국에는 아내와 같은 중증 장애인이 입원해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실'이 없었다.

 

두 달을 기다린 끝에 입원했지만, 병실은 "아비규환"이었다. 보호자들과 간병인들은 병실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으며 밤낮 없이 TV를 틀어 놨다. 방문객도 들끓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내의 상태 또한 부침이 컸다.

 

"하루는 입원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영국과 독일의 재활병원을 경험했잖아? 나중에 우리가 경험한 대로 환자의 부름에 늘 응답하고, 환자를 인격체로 대하는 작고 아름다운 병원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아내가 화답했다. "그래요. 정말 그런 병원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내게 꿈이 생겼다.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가족처럼 보살피는 병원, 콘크리트 빌딩에 환자가 갇혀 있는 병원이 아니라 마치 내 집 같은 목조주택에서, 푸른 잔디와 오솔길을 거닐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작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꿈 말이다."(위의 책, 46쪽)

 

푸르메재단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푸르메재단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3. '피'와 '맥주'로 재단을 만들다

 

병원을 세우기 위해 재단법인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단 주체인 재산과 실적이 필요했다. 결국 돈이 필요했다.

 

백 상임이사는 독일 연수 시절 알게 된, "한국에 가면 프리미엄 맥주회사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방호권, 언론사 후배 이원식과 함께 맥주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와 아내, 취재로 만난 기업가까지 만류했지만 그는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그동안 직장생활만 해왔지만 열심히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독일에서 즐겼던 맥주와 관련된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위의 책, 51쪽)

 

사업은 다행히 순항했다. 그는 "가해자 측 보험회사로부터 아내가 사용할 전동휠체어와 의족 구입을 위한 '우선피해보상금' 1억원"에 사업 지분을 기본재산으로 보건복지부에 재단설립허가를 요청했다. 그렇게 푸르메재단의 닻을 올렸다.

 

백 상임이사는 장애인 문제에 애정을 가지고 병원 건립에 힘을 모아줄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승낙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1973년 정신장애 어린이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만든 김성수 전 성공회대 총장처럼 어렵게 모신 분도 있었다. 그렇게 2004년 8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푸르메재단의 창립발기인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문턱은 높기만 했다. 사업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본재산이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기본재산이 최소한 10억 원은 넘어야 했다. 주변에 하소연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시름에 빠져있던 백 상임이사에게 아내가 '피해보상금을 받으면 절반을 재단에 출연하자'고 제안했다. 그와 아내는 고심 끝에 가해자가 제시한 피해보상 제안을 수락했다. '피'의 보상금이었다.

 

"계속되는 공방전도 참기 힘들었지만 사고를 낸 가해자와 보험회사가 8년이 지나도록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것이 우리를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책임 소재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 벌일수록 그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커졌다. 뉴스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에서 천불이 났다."(위의 책, 60쪽)

 

4. 사람이 희망이다

 

2005년 3월 드디어 재단을 세워도 좋다는 설립허가가 떨어졌다. 백 상임이사는 재단 설립과 동시에 그룹 '클론'의 멤버로 오토바이 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된 강원래 씨와 교통사고로 전신의 55%에 화상을 당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지선 씨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홍보대사를 맡아달라고 호소했다.

 

푸르메재단은 첫 번째 사업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따뜻한 책을 출간하기로 계획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누군가 등을 토닥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 상임이사는 문뜩 박완서 선생님(1931.10. 20~2011. 1. 22)을 떠올리고,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제 별명이 박완서 동생입니다. 조금 큰 앞니와 아래로 처진 눈매 때문에 선한 인상과 따뜻한 미소를 지니신 선생님을 제가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선생님의 글이 필요합니다."(푸르메재단 스토리 '젊고 아름다워 포기할 수 없던 꿈' 중)

 

박완서 선생님 아들과 같은 나이지만 '동생'이라는 말 때문일까. "기꺼이 글을 써주겠다"는 답장이 왔다. 그리고 한 달 뒤, 아흔 살 어머니가 임종을 맞으면서 고향 집에서 일하던 머슴 '호뱅이'를 찾았다는 '엄마의 마지막 유머'라는 글을 보내왔다. 박완서 선생님 외에도 김혜자 배우와 강원래·이지선 등 23명이 공저한 책 <사는 게 맛있다>는 그렇게 탄생했다.

 

백 상임이사는 '아름다운 재활병원' 건립이라는 꿈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갔지만 쉽지는 않았다. "발바닥에 땀이 나게 대기업 대표와 사회공헌팀을 찾아다니며 재활병원 건립을 호소했지만", 기업들은 '정부가 있는데 왜 기업이?'라는 반응을 보이든가 '단기간에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만 원했다.

 

답답한 나날이 계속되던 때, 물꼬를 터준 것은 기업도 정부도 아닌 시민들이었다. "나도 한번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며 서울대 치과 교수로 일하다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개업한 장경수 원장과 10여 명의 자원봉사 의사 덕에 2007년 7월 민간 최초의 장애인전용 치과인 '푸르메나눔치과'가 종로구 신교동에 문을 열었다.

 

재단이 시나브로 알려지면서 카이스트 박사 과정 중 실험실 폭발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강지훈 씨, 군대에서 훈련 중 3급 장애인이 된 이재식 씨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양남수 부부,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외국계 은행에서 아르바이트한 비용을 쾌척한 이현아 씨 등 기부의 손길도 이어졌다.

 

故 박완서 선생님(가운데)과 푸르메재단 홍보대사인 이지선 씨(박완서 선생님 왼쪽), 백경학 상임이사(왼쪽).故 박완서 선생님(가운데)과 푸르메재단 홍보대사인 이지선 씨(박완서 선생님 왼쪽), 백경학 상임이사(왼쪽).

 

5. 병원의 주춧돌을 놓아준 '키다리 아저씨'

 

2008년 8월부터 푸르메재단 통장으로 매달 50만 원의 후원이 들어왔다. 백 상임이사는 개인이 기부하기에는 큰 금액이라는 생각으로 은행에 알아봤더니 송금자가 '이철재'로 되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사업가를 예상하며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젊은 남성이 휠체어를 타고 나온 것.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키도 185㎝를 훌쩍 넘는 것 같았다. 이 대표는 자신의 별명이 '키다리 아저씨'라고 했다.

 

"저의 집이 푸르메재단에서 멀지 않은 청운동에 있습니다. 매일 그 앞을 지나 출근하지요. 어느 날 노란색 푸르메(푸른 산이란 뜻)란 간판을 보고 '환경단체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장애어린이의 조기발견과 재활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직 없는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조기치료의 중요성을 절감하지요. 저는 운 좋게 미국에서 가장 좋은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는 저에게 4000만원이 넘는 좋은 전동휠체어와 각종 보장구를 제공해줬고, 원하는 공부(도) 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거지요. 그래서 마음 한 곳에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푸르메재단 스토리 중 '키다리 아저씨의 어린이 사랑')

 

'키다리 아저씨'의 기부는 월 50만 원에 그치지 않았다. 백 상임이사는 2011년 지금의 자리에 재활의원과 치과, 복지관을 운영하기 위한 센터 건립을 계획하고 "매일 기업의 문을 두드리고 거리모금에도 나섰"지만, 목표치에 2%로 부족한 상태였다. 그때 이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금을 보냈는데, 미국 출장 중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봐놨다며 센터가 완공되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그림을 걸어달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회계담당 직원이 흥분해 달려왔다. 10억원이 재단통장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송금자는 이철재라고 쓰여있었다. <쿼드디멘션스>를 큰 기업에 인수합병하는 조건으로 그 회사의 비상장 주식을 받았는데 이것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재단에 기부한 것이었다. 비상장주식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기부한다는 것은 수중에 있는 돈을 기부하는 것보다 열 배, 스무 배 어려운 일이다."(위의 글 중)

 

이 대표는, 지금도 후원자 중 키가 가장 큰 '키다리 아저씨'다. 키가 커서만은 아니다. 15년 이상 재단의 든든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끝이 보이지 않았던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건립에 첫 주춧돌을 놓"아준 귀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2021년 4월 푸르메센터 4층 대강당에 '이철재홀'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푸르메재단은 푸르메센터와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크게 기여한 이철재 기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강당을 '이철재홀'이라고 이름 붙였다푸르메재단은 푸르메센터와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크게 기여한 이철재 기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강당을 '이철재홀'이라고 이름 붙였다.

6. 따뜻한 사람 故 김정주 "푸르메재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백 상임이사는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큰 도움을 준 김정주 넥슨 대표(1968. 2. 22~2022. 2. 27)를 "진국"이라고 표현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수줍음이 많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대표와 인연은 2011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 달 전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때 주된 일과가 신문들을 읽는 것이었지요.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와 함께 일했던 이철재 사장이 푸르메재단에 큰 기부를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으신 분이 역경을 딛고 성공한 것도 대단한데 거액을 기부하다니…. 크게 감동했습니다. 넥슨과 우리 부부도 푸르메재단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푸르메재단 스토리 '넥슨, 국내 유일 어린이재활병원의 초석을 놓다' 중)

 

백 상임이사는 "너무 반가워 김 대표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오랜 친구처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에 아직 어린이재활전문병원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는 "단순히 기금을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넥슨 임직원이 지속적인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김 대표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푸르메재활의원이 문을 열었지만, 작은 규모에 늘 북적였다. 차례를 기다리는 장애어린이 어머니들은 좀 더 큰 병원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백 상임이사는 "걷지 못하던 꼬마가 기적처럼 첫 걸음마를 뗐던 순간", 그 빛나는 순간을 마주하며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마침 김 대표의 제주도 집에 초대를 받았다. 백 상임이사는 김 대표에게 '병원을 짓자'고 제안했다.

 

"병원을 짓자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김정주 대표 부부는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병원이 세워지면 어린이 100명이 입원하고 하루 500명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신체가 불편한 어린이뿐 아니라 자폐와 과몰입 어린이 등 재활의학과와 소아정신과, 소아과, 소아치과 등 통합진료를 할 수 있습니다. 넥슨에서 그 기적을 만들어주십시오.""(푸르메재단 스토리 '흔쾌히 200억원을 기부하다' 중)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병원 건립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백 상임이사는 제주도를 방문해 200억 기부를 제안한 기억이 흐릿해질 때쯤 다시 김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푸르메재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병원을 어떻게 짓고 운영할지 구체적인 계획서를 보내주십시오."(위의 글 중)

 

김 대표의 전화 이후 상황은 빠르게 돌아갔다.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역임한 박홍섭 전 마포구청장을 설득해 마포구가 상암동 사회복지시설용지를 제3섹터 방식으로 매입했고, 김 대표의 200억이 마중물이 돼 2년 동안 시민 1만 명과 500개 기업이 병원 건립에 힘을 보탰다.

 

국내 최초로 시민, 기업, 정부, 지자체가 함께 건립한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은 2016년 4월 말 문을 열었다. 지상 7층, 지하 3층, 입원 병상 91개 규모이며, 재활의학과·정신건강의학과·치과·소아청소년과 등 4개의 진료과와 신체영역치료실, ABA조기집중치료실 등을 갖추었다.

 

또한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직업재활센터, 수영장·문화센터·어린이도서관·카페·다목적홀 등 주민복지시설을 갖춰 장애어린이뿐만 아니라 비장애어린이와 지역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조성됐다. 일일 500명, 연간 15만 명의 장애어린이와 지역주민이 혜택을 받고 있다.

 

故 김정주 NXC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는 2014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 기금으로 200억 원이라는 큰 돈을 푸르메재단에 기부했다.故 김정주 NXC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는 2014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 기금으로 200억 원이라는 큰 돈을 푸르메재단에 기부했다.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하는 모습.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하는 모습.

 

7. 푸르메소셜팜…"아들도 이렇게 행복하게 농사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약속한 '아름다운 재활병원'이 건립된 후에도 백 상임이사의 꿈은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서 잘 치료받고 열심히 학업을 마쳐도, 성인이 되면 갈 곳이 없어 또다시 집에서 24시간을 어머니와 지내야 하는, 발달장애인 청년들을 보면서 "조금만 끌어주면 독립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컸다. 그의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그 청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 우리는 '농업'이라고 생각했다. 청년들이 행복해하고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소비자와 연결하는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백 상임이사의 바람이 전달된 걸까. 경기도 여주에서 버섯과 인삼을 재배하던 이상훈·장춘순 부부가 농장 일에 지쳐가던 즈음, 부부의 눈에 들어온 기사가 있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립이고, 푸르메재단이란 곳에서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해 스마트농장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부는 그 길로 푸르메재단을 찾아와 시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1만 1800m²(3600평)를 기부했다.

 

"부부는 아들이 성인이 됐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결론은 농사였다. 몸은 힘들지만 정성을 다해 작물 키우는 농사는 정직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못한다. 하지만 부부는 남달랐다.

 

장춘순 여사에게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강한 아들을 만들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강한 부모, 강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 늦깎이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어린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어떤 준비를 하는지, 장애아들이 어떤 농사를 짓는 것이 좋은지 확인하기 위해 유럽의 장애인 작업장과 네덜란드 농장을 찾아갔다. 유럽의 한 작업장에서 만난 청년은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이 청년이 말랑말랑한 감촉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서 아들도 이렇게 행복하게 농사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푸르메재단 스토리 '어머니의 위대한 유산' 중)

 

바람이 현실이 되자, 백 상임이사에게는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 기부 받은 땅을 어떻게 하면 자립의 터로 탈바꿈시킬 것인가.

 

"함께 지을 파트너를 찾다가 여주와 이웃한 이천에 국내 최대 규모의 반도체공장인 SK하이닉스가 떠올랐다. 최태원 회장의 주도로 SK는 환경 및 사회문제 해결, 투명 경영을 기치로 한 ESG 정책을 강하게 추진 중이었다. 발달장애인의 평생 일터인 농장을 지어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ESG가 어디 있겠는가."(위의 글 중)

 

그렇게 SK하이닉스가 전체 농장 건립비 3분의 1에 해당하는 50억 원을 기부했다. 여기에 여주시와 한국지역난방공사도 동참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부족한 재정은 시민들의 기부로 메워졌다.

 

푸르메소셜팜은 2020년 10월 29일 첫 삽을 뜬 지 2년여 만에 스마트팜, 베이커리카페, 교육문화센터 등을 갖춘 장애 청년 농부들의 일터로 재탄생했다. 땅을 기부한 이상훈·장춘순 부부의 아들도 푸르메소셜팜의 농부가 돼 친구들과 함께 출퇴근을 하며 일을 하고 있다.

 

푸르메소셜팜 오픈 1년. 음료를 만드는 성주 씨, 방울토마토 피자 빵을 만드는 우석 씨 등은 오늘도 베이커리카페 '무이숲'에서 일도 하고 꿈도 꾼다.(☞ 바로 가기 : 푸르메재단 유튜브 '무이숲의 1년')

 

푸르메소셜팜 베이커리카페 '무이숲'에서 일하고 있는 발달장애 청년들. 카페 이름인 '무이(無異)'는 '다름이 없다'라는 뜻이다.푸르메소셜팜 베이커리카페 '무이숲'에서 일하고 있는 발달장애 청년들. 카페 이름인 '무이(無異)'는 '다름이 없다'라는 뜻이다.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푸르메소셜팜 전경.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푸르메소셜팜 전경.

개인의 행복과 불행마저 수치화되는 세상이지만, 그는 지금도 꿈을 꾼다

 

전홍기혜 :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인프라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갈수록 자본의 논리가 우선시되는 상황이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 같다.

 

백경학 : 고민하면 할수록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스스로 반문하게 된다. '대통령이 어느 날 몇 달간만 장애인이 돼서 실제로 경험해 보면, 정책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할 정도로….

 

전홍기혜 : '약자복지 포용복지'가 대선 공약이었지만, 윤석열 정부의 복지 정책은 사실상 '시장복지'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사회보장 전략회의에서 "정부가 재정을 풀어서 사회보장을 하려고 하면 사회보장서비스 자체도 시장화·산업화가 되고 경쟁체제로 가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백경학 : '복지'라는 게 숫자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재활병원을 짓는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어떤 치료를 받고 치료비용은 누가 감당을 하고 같은 문제가 종합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그런데 보건복지부에서 재활병원이 필요하다고 예산을 올려도 기획재정부에서는 예산을 삭감하기 바쁘니까. 갈수록 개인의 행복과 불행, 또 절실한 요구가 다 수치화되는 것 같다.

 

전홍기혜 : 재단과 병원, 그리고 농장까지 장애인의 '보편적인 삶'을 위해 20여 년을 숨 가쁘게 달려왔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백경학 : 푸르메소셜팜 같은 농장이 수도권에도 조성됐으면 좋겠다. 여주도 좋은 위치지만, 장애 청년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자유롭게 출퇴근할 수 있는 도시형 모델의 농장을 짓는 것이 바람이다.

 

이에 더해 바람이 있다면, 포괄적인 개념의 '푸르메마을'을 만들고 싶다. 유럽의 한 공동체마을에 갔었는데, 장애 청년들이 자유롭게 놀면서 일도 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그런 곳이 필요하다. 장애인이 보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사업장, 쉼터, 캠핑장, 전시장, 공방 등 다양한 형태의 공간이 필요하다. 하루종일 행복하게 '놀멍쉬멍' 할 수 있는 곳.

 

이명선 기자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300013?sid=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