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돌봄의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곳 '케어팜' 이야기
돌봄의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곳 '케어팜' 이야기
2020-12-03
네덜란드에는 장애인들과 노인들이 어울려 가꾸는 도시형 농장이 곳곳에 있다. 앞장선 노인이 괭이로 땅을 파면, 장애 청년들이 따라가면서 씨앗을 넣는다. 농장 한쪽의 가축 사육장에서는 장애 청년이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준다. 이처럼 '사회적 돌봄'(Care)을 '농장'(Farm)에서 실현하는 복지 시스템을 '케어팜(Care Farm)'이라고 한다.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이사 등 재단 관계자들이 쓴 '누구나 일하고 싶은 농장을 만듭니다'는 자립과 재활의 공간으로 케어팜을 조명한다.
농장 경영주이자 네덜란드 사회적 농업의 권위자인 얀 하싱크 교수는 "장애 청년이나 치매 노인 등 모든 농장 이용자가 농업의 치유 효과를 경험한다"며 "작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키우면서 자연스레 정서적 안정을 찾는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작물을 키우는 과정에서 발달 장애인이 '돌봄을 받는 객체에서 돌봄을 주는 주체'로 거듭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책은 강조한다. 부모나 교사에게 보호나 도움을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는 체험을 통해 자존감이 자라기 때문이다.
특히 매일 똑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작물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작물의 성장에 따라 환경과 작업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에 현재 장애인 일자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단순 임가공 작업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장점에 따라 케어팜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복지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럽 전역에 3천 곳이 넘는 케어팜이 운영되며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도 사회적 농업을 장려하고 있다.
반면 국내의 '치유 농업'은 아직 시작 단계로 푸르메재단 등 소수만 운영하고 있다.
푸르메스마트팜 서울농원의 장경원 원장은 "농업이야말로 발달 장애인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라고 힘줘 말한다. 처음에는 손에 흙을 묻히는 일조차 꺼리던 장애인도 자기가 물을 준 화분에서 생명이 자라기 시작하면 주위에 자랑하고, 자신이 수확한 작물을 판매하며 소비자와도 즐겁게 소통한다고 한다.
이런 케어팜으로 온실 농업에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등의 기술을 적용해 통제하는 '스마트팜'이 적합하다고 책은 설명한다.
스마트팜은 첨단 기술이 적용된 유리온실로 사철 쾌적하고 안전한 작업 환경을 제공하며 일정 공간에서 최대한의 생산을 꾀하는 만큼 도심과 가까운 곳, 장애인들이 비교적 편리하게 출퇴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푸르메재단이 안정적 운영을 기준으로 시뮬레이션을 진행한 결과 '스마트 케어팜' 1개의 적정 모델은 4천평 정도의 면적에 딸기나 토마토를 중심으로 1천500∼2천평의 유리온실이 들어서고, 카페와 레스토랑, 방문객과 지역 주민을 위한 체험 교육장 및 파머스 마켓 등 부대시설을 갖추는 것이다. 이곳에서 발달 장애 청년 직원 및 청소년 교육생 300명 안팎이 자립과 희망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재단은 예측한다.
다만, 우리 사회에 사회적 농업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스마트팜 구축이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마련 외에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고 책은 지적한다.
발달 장애인의 직업 훈련과 임금 체계 정비, 시설 관련 규제 완화 등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제도와 정책을 넘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문화가 확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키. 256쪽. 1만6천500원.
김준억 기자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201203111000005?input=119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