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동네 복지관으로 출근하는 '재활의학 원로'

동네 복지관으로 출근하는 '재활의학 원로'

2012-05-28

'재활의학 1세대' 이일영 교수… 치료는 지역사회서 시작돼야
"편하게 누워서 등에다 핫팩 얹고, 약만 진탕 먹어봤자 아무 소용 없는 거 아시죠? 운동만이 보약이에요, 운동!"

지난 10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과천시장애인복지관 물리치료실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 곁에 바짝 붙어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백발의 노인은 지난해 7월 과천시장애인복지관이 생긴 뒤부터 매주 2~3번씩 출근해 환자들을 들들 볶고 있다. 그는 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도, 물리치료사도 아니다.

주인공은 이일영(67) 교수.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이 교수는 16년 동안 미국 국립 웨스트 록스버리(West Roxbury) 보훈병원 척수손상재활센터 과장을 지내고, 귀국해 아주대 재활의학과장을 역임했다. 국내 재활의학 1세대로 꼽히는 이 교수는 전세계 90개국이 가입해 있는 세계재활협회에 6명뿐인 부회장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잘나가는' 의사인 그가 지난 2009년 정년퇴임을 한 뒤 복지재단 이사장 등 수많은 감투를 뿌리치고 '동네 복지관'으로 출근해 환자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운동만이 보약이에요, 운동!" 지난 10일 경기 과천장애인복지관에서 재활의학과 전문의인 이일영 박사가 환자에게 재활치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foru82@chosun.com
이 교수는 "미국에 살다 한국에 들어와서 1년 동안 했던 진료가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1984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1년 동안 척수손상 환자의 재활치료를 담당했다.

"미국에서 배운 의술로 한국 환자를 치료하려 했는데 결과는 절망적이었어요.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가 없는 거예요. 여건이 나은 미국에서도 환자가 줄을 섰는데…. 주변에서 '중증 장애를 가진 환자들이 큰 병원까지 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깨달았죠. 훌륭한 의사와 시설을 갖춘 큰 병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지역사회에서 재활이 시작되지 않고선 의미가 없다는 걸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아주대 재활의학과장으로 외래 환자를 돌보던 이 교수는 자신의 지론을 제자들에게 설파하는 동시에 척수손상 환자들의 자조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에 나가 환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진료가 끝난 뒤에는 직접 차를 몰고 병원에 오기 힘든 환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는 방문 진료도 했다. 이 교수는 "정년 퇴임 뒤에는 낮은 곳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살겠다고 결심하고 준비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과천시장애인복지관으로 출근해 환자 무료 봉사뿐만 아니라 저소득층과 장애인을 위한 푸르메재단의 민간 재활병원 건립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가 바라는 이상적인 재활병원을 짓기 위해서다.

이 교수는 남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있다고 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사회에서 문제 없이 섞여 살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누구든 장애를 갖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얻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의 재활이 완성되는 거죠. 과천장애인복지관을 그 모델로 만드는 게 제 마지막 소명이 아닐까요?"

석남준 기자 namju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