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죽을 듯한 고통을 주시고 살리신 이유
[동아광장/백경학]죽을 듯한 고통을 주시고 살리신 이유
2011-10-13
1998년 6월 영국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스코틀랜드와 북잉글랜드의 국경도시 칼라일의 작은 병원에 머물러야 했다. 칼라일은 우리의 영월이나 태백 같은 오지의 도시였다. 여행 중에 나타난 벤츠승용차 한 대가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인생의 차선이 크게 변경된 것이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내를 지켜보며 나는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동경했던 백야(白夜)는 신비와 낭만으로 가득 찼지만 현실 속에 맞닥뜨린 스코틀랜드의 백야는 슬픔과 고통의 백야였다. 밤 11시가 넘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날이 밝아왔다. 여름비가 일주일째 중환자실 창문을 때렸다. 아내는 혼수상태였다. 사고가 나기 몇 |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
그러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아이의 속옷을 꺼내던 아내에게 자동차 한 대가 돌진해 왔다. 나중에 영국 검찰로부터 들었지만 사고를 낸 사람은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어 이날 여러 알의 두통약을 먹은 뒤 정신을 잃고 사고를 냈다고 한다.
교통사고 당한 아내,기적같이 살아 수술 후 고비를 넘기는가 했지만 아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사고 충격으로 양쪽 신장 기능이 멈추자 체온이 42도를 넘어섰고 혈압은 270까지 치솟았다. 아내는 다시 수술을 받았지만 수술 부위가 감염되면서 아내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달려온 장모님은 영국 주치의 말을 듣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자네, 강하게 마음먹고 장례식을 준비하게!” 아내가 24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독일 성당에서 일하고 계시던 김용해 신부님이 달려와 죽음이 임박한 아내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런던 한인성당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유럽의 한인 가톨릭교회는 시간을 정해 아내의 소생을 간구하는 미사를 일제히 올렸다. 교인들의 사고 후 70일 만에 거짓말처럼 아내의 의식이 돌아왔다. “여기가 어디야, 아니, 엄마가 어떻게 여기에 왔어?” 나와 딸애 그리고 장모님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돌아온 아내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독일 땅을 다시 밟았다. 그리고 1년 반동안 독일 병원에서 혹독한 재활치료를 받은 뒤 귀국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치료를 받기 위해 석 달을 기다려 재활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고 어렵게 입원한 후에도 환자 가족과 간병인이 좁은 병실에서 24시간 함께 생활해야 했다. 내가 영국 오지의 작은 병원에서 애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영국 의료진의 헌신과 환자 중심으로 설계되고 움직이는 의료시스템이 아내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병원의 현실은 너무 열악하고 가혹했다. 병원세워 장애인 돌보라는 메시지 가끔 하느님이 아내와 우리 가족에게 죽을 듯한 고통을 주시고 다시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되새겨보곤 한다. 장애인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던 네가 죽을 듯한 고통을 맛보았으니 고통 속에 살아가는 다른 장애인을 끌어안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매년 30만 명이 사고와 질병으로 장애인이 되고 있다. 이 중 치료가 절실한 장애환자들을 위해 푸르메재단이 꿈꾸는 재활병원이 하루빨리 세워졌으면 좋겠다. 백경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