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몸은 불편하지만 꿈은 한라산보다 커졌어요」
「몸은 불편하지만 꿈은 한라산보다 커졌어요」
8848m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엄홍길 대장에게 한라산은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한라산 등반'은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만큼 힘들었고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보다 큰 성취감을 주었다.
엄홍길 대장이 16명의 장애 청소년들과 함께 제주 올레길을 걷고 한라산을 올랐다. 외환은행 나눔재단과 푸르메재단이 주최한 '장애청소년과 엄홍길 대장이 함께하는 제주도 비전 트레킹’이 지난 16~19일 올레길 걷기와 한라산 등반 일정으로 진행됐다. 외환은행 관계자들은 장애 청소년 16명과 1대 1멘토로 참여해 아이들의 발과 귀가 됐다. 이들은 16일 올레길을 걸으며 몸을 풀고, 17일 이른 아침부터 한라산을 올랐다.
지난 16일 아침 대문 앞 좁은 골목을 나서듯 16명의 장애 청소년들은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 조심스레 올레길 산책의 첫발을 내디뎠다.
아직은 세상밖으로 나가기가 두렵기만 한 아이들에게 올레길은 마음의 빗장을 열기위한 새로운 출발이었다.
"선자야, 저게 외돌개야. 외롭게 혼자 서있는 바위. 여기 지도에도 나오지?" 엄 대장의 등산스틱이 올레길에서는 훌륭한 지시봉이 된다.
아이들은 엄 대장이 가리키는 자연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처음 맡아본 제주도의 향기는 비릿하면서도 상쾌하다.
저 멀리서 형석(12)이가 "대장님 같이 가요"라며 뒤뚱 뒤뚱 달려온다. 엄 대장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 대장님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며 손을 내민다. 엄 대장의 손을 꼭 잡은 형석이는 "대장님 히말라야 갔어요? 거기 안추웠어요?" 라며 이것 저것 물어온다.
올레 7코스를 걷다가 올레 10코스로 향했다. 바다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지만 거동이 불편한 아이들에게 울퉁불퉁한 현무암과 발걸음을 내딛을때마다 움푹 들어가는 모랫길이 쉽지만은 않다. "대단해, 아주 잘 가고 있어. 먼저 왔다고 먼저 가는거 아니야 서로 기다려줘야지" 엄 대장은 아이들을 부축하며 힘을 붇돋운다. 다리에 힘이 달려 걷기 힘든 맏형 재웅(21)군은 안경을 추켜올리려다가 결국 넘어지고 만다. 재웅군의 양 팔을 부축하던 멘토들 역시 땀범벅이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재승(16)군은 험한 길이 계속 나오자 "여기가 대장님이 말해주신 에베레스트에요?"라며 가쁜 숨을 쉰다.엄 대장이 껄껄 웃자 재승군은 "대장님이 짝 해줘서 너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17일 새벽 5시 30분, 주최측이 등산 준비에 한창인 보람이(18,여)를 부른다. 보람이가 전날 올레길을 걷다 경기를 일으킨 게 이내 걱정돼 한라산 등반을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괜찮은데, 저 진짜 괜찮아요"보람이는 끝까지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힘들면 중간에 내려가야한다는 약속을 받고 보람이도 함께 등반을 하기로 했다.
엄 대장은 일일이 아이들의 등산화를 확인하고 헐거운 끈을 다시 묶어준다. 질문을 좋아하는 형석이가 엄 대장에게 "왜 대장님은 히말라야에 사람들하고 같이 올라갔어요?"라고 묻자 엄 대장은 "산에서는 혼자 빨리가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함께, 같이 가는게 중요한 거니까. 형석이도 오늘 꼭 그래야 한다"며 당부했다.
한라산에서는 12시 30분에 산 중턱인 진달래 휴게소에 도착해야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다. 이후에 도착하면 등산로가 통제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날다람쥐'만성(14)이는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걷는 것 처음"이라면서도 "날다람쥐처럼 계속 날아다닐거에요"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진달래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으며 올라갈 수 있는 아이들 총 9명을 선정했다. 올라오다 수없이 넘어진 철호(11)와 만성이도 열외가 됐다. 철호가 "나는 정말 가고 싶은데, 내가 안가면 엄마가 많이 실망할 거에요"라며 졸라보지만 위험하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상철(13)이와 형석(11)이는 재단 측에서 정상까지 걷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엄 대장이 "내가 데리고 간다.꿈을 지켜줘야 한다"고 해 함께 산을 올랐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형석이와 상철이의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자꾸만 주저앉게 됐다. 하지만 절대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넘어지기고 다시 일어서기를 수차례, 출발한지 6시간만에 결국 백록담에 다다랐다. 아이들은 "우리가 해냈다!"라며 환호했다. 엄 대장은 "여기는 너희들이 태어나서 올라와 본 가장 높은 곳"이라며 "힘든일이 있을 때마다 여기에 올라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내라"고 말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쉽지 않다. 긴장이 풀린 아이들은 걸음을 내딛기 조차 힘들어 했다. 엄 대장은 '안되겠다'며 성철이를 등에 업었다. 성철이는 미안해 하며 업히기 싫어했지만 엄 대장이 "대장님 하중 훈련 하는거야. 히말라야 가려면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하거든"이라며 달래자 결국 엄 대장을 의지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엄 대장은 "힘은 들어도 아이들이 그만큼 즐거워 지니 행복하다"며 "언제 아이들이 한라산을 또 올라가보겠냐. 이번 도전으로 아이들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말했다. 출발한지 11시간 반. 해가 져 랜턴에 의지해 길을 걸으며 결국 출발점에 다시 도착했다.
연(18)이는 자신이 해냈다는 생각에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저기까지 올라갔다 왔다는걸 우리 엄마가 믿을 수 있을까요. 나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16명 천사들의 꿈과 자신감은 그들이 올라갔던 한라산의 높이만큼 쑥쑥 커가고 있었다.
[제주 = 이새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