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고난을 이긴 사람들 이야기
고난을 이긴 사람들 이야기
“애인을 찾으러 부산에 내려갔는데, 수중에는 돈이 1000원밖에 없었다. 그날 부산에서 900원짜리 여인숙을 잡고 나니 돈이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인숙 바닥에 누워 있는데, 여자에 대한 배신감과 돈이 없다는 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김수정)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아버지는 학비를 제대로 신경 써주지 않았다. 수업료를 납부하지 못해 수업시간에 학교 밖으로 내쫓긴 그는 부근 덕수궁을 실의에 차서 돌아다니길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수십 년 전 이야기지만 그는 지금도 선생님이 “일어나 나가!”라고 외치는 끔찍한 꿈을 가끔 꾼다고 한다.”(신문수)
이름만 들어도 친한 친구 같은 만화 캐릭터들이 먼저 떠오르지 않습니까? ‘아기공룡 둘리’를 그린 김수정, ‘도깨비 감투’의 신문수 화백입니다. 최근 발간된『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장상용 지음, 크림슨, 483쪽, 1만9000원)에서 이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 책은 스포츠 신문 기자인 저자가 한국 유명 만화가들의 이야기를 모아 기록한 책입니다. 2004년에 나온『18: 한국 대표 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 1, 2』의 개정판이지요.
이 책에는 유난히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성공한 이들이 뒤를 돌아보면 모든 게 무용담으로 미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만화가들의 이야기는 경우가 좀 달라보입니다. 매체의 위상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하찮은 매체로 여겨지던 만화였으니 오죽했을까요. 만화가들의 집념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는 더 옹골차 보입니다.
박봉성 편에는 1978년에 붓을 꺾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어도 만화가로 죽겠다고 했던 결심도 추위와 배고픔에 벌벌 떠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그리고 한복에 금박 붙이는 일을 4년이나 했습니다. 생뚱맞은 일에 바친 긴 외도였지만 이 일을 통해 “뭘 해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하니 고난조차도 소중한 삶의 일부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네가 있어 다행이야』(푸르메재단 엮음, 이원태 그림, 창해, 240쪽, 9800원)는 만화가는 아니지만 유명 인사들이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중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씨의 이야기가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는 “한없이 작아진 자신의 모습은 회한과 함께 진정한 나의 원형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며 절망의 순간에 “자식을 감싸안는 어미의 마음으로 팽개쳐진 자신을 감싸안았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우리 삶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가에, 환율에, 집값에 모두가 걱정입니다. 홍세화씨는 “절망은 비록 강제로 주어지지만 그것이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쉼표’가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따뜻한 귀절이 더욱 필요한 계절입니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2008.11.01 01:14 입력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