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손에 손잡고 한걸음 한걸음, 1236계단 밟고 천지 오르다
손에 손잡고 한걸음 한걸음, 1236계단 밟고 천지 오르다
“천천히, 천천히….”
5일 오후 산악인 엄홍길(48) 대장과 ‘백만 불짜리 다리’를 가진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26) 씨는 김소연(14) 양의 두 손을 각각 쥐고 계단을 오르며 이렇게 구호를 외쳤다. 110cm의 키로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김 양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기 위한 것.
8명의 장애청소년과 푸르메재단, 외환은행 직원 등 일행 30여 명은 모두 1236개의 계단을 밟고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맑고 투명한 천지의 장관이 펼쳐진 순간 엄 대장은 “여러분의 염원으로 천지가 보입니다”라고 외쳤고 일행들은 환호했다. 엄 대장은 “백두산 천지는 날씨가 좋지 않아 구경하기 어렵다”며 “세 번 백두산에 오고서야 천지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정호승(58) 시인은 19년 전 자신이 백두산에 올랐을 때 쓴 시 ‘백두산’을 낭독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의 사랑이 언젠가 다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두만강을 건너 묘향산을 지나 백두산은 한라산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고 낭송한 정 시인은 “천지를 봤을 때 항아리에 고인 물로 여겨져서 이 물이 제주도까지 가면 남과 북이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시를 썼다”고 회고했다.
외환은행과 푸르메재단이 주최한 ‘장애청소년과 엄홍길 대장이 함께하는 백두산 트레킹’은 중국 랴오닝(遼寧) 성, 지린(吉林) 성 등지에서 4일부터 7일까지 3박 4일간 백두산 등반, 고구려 문화유산 답사 등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이번 행사에는 장애청소년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시련을 이겨낸 인사들이 동행했다.
엄 대장은 “38번이나 8000m 이상 높이의 산에 도전해 18번을 실패하고 동료 10명을 잃었다”며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했다. 자폐증을 앓으면서도 국내 최연소로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했던 배형진 씨는 청소년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의수화가 석창우(53) 화백은 두 팔 없이 의수로 붓을 쥐고 인물의 생생한 움직임을 포착해 누드크로키를 그리는 화가. 석 화백은 산 위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며 누드크로키로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자원봉사를 맡은 외환은행 나눔재단 이충원 사무국장은 “순수한 마음을 느끼고 오히려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배형진 씨의 어머니 박미경(49) 씨는 “형진이를 키우며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은 인내였다”며 “이번 행사가 스스로를 돌보는 치유의 과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백두산=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