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혼신의 연주에, 아리가토 눈빛 답례

[이사람] 혼신의 연주에 “아리가토” 눈빛 답례

일본 장애 친구위해 연주한 ‘장애인 피아니스트’ 김경민씨


» 눈으로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애인 후지이(왼쪽)씨가 지난달 24일 오사카 미시요도가와 특별지원학교에서 뇌성마비 피아니스트인 김경민씨의 연주를 듣고 있다. 오사카/김명진 기자

10여분간 아픔 참으며 후지이에 즉석 연주
“장애 이겨낸 과정 음악으로 들려주고싶어”

뒤틀린 몸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수제작물(UCC)로 유명세를 누린 ‘장애인 피아니스트’ 김경민(27·뇌성마비1급)씨가 이를 악물었다. 선천적으로 근육이 수축해 몸이 불편한 김씨는 피아노 앞에 앉을 때 팔과 다리의 떨림을 막으려고 온몸에 힘을 모은다.

지난달 25일 김씨의 작은 음악회가 열린 곳은 중증 장애인 100명이 다니고 있는 일본 오사카시 미시요도가와 특별지원학교였다. 장애인 재활 사업을 지원하는 푸르메재단이 마련한 일본 복지시설 연수에 참가한 김씨는 때마침 모교를 방문한 ‘일본판 잠수종과 나비’(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장 도미니크 보비의 책)의 주인공 후지이 노리유키(32)를 만났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장애인 지원 단체인 ‘일상생활지원센터’에서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는 후지이는 눈과 발가락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중증 장애인이다. 그의 “친구이자 형제”라는 활동보조인 기쿠 히로유키(35)는 후지이의 눈짓을 문장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달하는 그의 메신저다. 둘의 모습을 본 김씨는 즉석에서 피아노 연주를 자청했다. 김씨는 “지난 시간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을 음악으로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을 마실 때마다 얼굴을 적시고 말던, 덜덜 떨리던 김씨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렸다. 36도까지 달궈진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찬 강당에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선율이 흐르자, 이번에는 후지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김씨는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건반에 열중하다가도 후지이가 탄 휠체어가 피아노 곁으로 다가오자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음을 지었다. ‘월광소나타’ 다음으로는 일본에 ‘욘사마 열풍’을 몰고 온 드라마 <겨울연가>의 삽입곡인 ‘마이 메모리’가 연주됐다. 후지이에게 익숙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던 김씨의 선곡이었다.

10분여의 짧은 연주가 끝난 뒤, 후지이가 기쿠에게 눈빛을 보냈다. 곧 기쿠가 일본 문자 히라가나를 순서대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카사다 …”. ‘아’에서 눈빛을 주자 기쿠가 다시 “아이우에오”를 읊는다. ‘아’에서 눈빛. 다시 “아카사다 … (눈짓), 라리루(눈짓)” 우리말로 따지면 눈빛을 교환해 ‘가나다라’로 음운의 초성을 붙이고, 모음을 정해 단어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수십여 차례의 눈짓으로 2분여 시간이 지난 뒤 조합된 단어, “아리가토”가 기쿠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고맙습니다”라는 뜻이었다.

후지이의 감사 인사를 들은 김씨는 휠체어로 다가가 제각각 꺾여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김씨는 마주 잡은 두 손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뒤틀리는 사지 근육을 수영·헬스·마라톤으로 유연하게 만들고, 하루 5시간 이상 연습으로 음악을 전달하는 김씨와, 수십 번의 눈짓으로 동료 장애인들을 상담해 주는 후지이는 그렇게 닮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애정은 각자 이겨낸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는 듯했다.

김씨는 “그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자기 한계를 극복해 낸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눈빛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쿠는 “후지이가 연주를 듣고 굉장히 감동을 받은 것 같다”며 “김씨의 피아노 연주를 일본의 장애인들에게도 많이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후지이는 기쿠의 설명이 틀리지 않다는 듯 갓난아이처럼 소리내어 웃었다.

오사카/글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