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나눔으로 사랑 실천

 

나눔으로 사랑 실천 '닮은꼴 부부'

공익재단에 10억 기부 백경학·황혜경씨
거울을 보듯 서로를 쏙 빼닮은 부부가 있다.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마음 씀씀이가 판박이다. 부부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하는 게 많다. 지난해 돈을 공익재단에 기부할 때도 그랬다. 그 돈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 10년 가까이 소송을 벌인 끝에 받아낸 보상금이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끔찍한 교통사고였다. 그러나 부인은 주저없이 그 돈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남편은 그저 고개를 끄떡였을 뿐이다. 부부는 늘 이런 식이다. 말이 필요 없는, 이심전심이 따로 없다. 백경학(43)·황혜경(41)씨가 사는 모습이다.

  ◇백경학(오른쪽)·황혜경씨 부부가 10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여운헌빌딩 푸르메재단 사무실에서 장애인 재활병원 및 재활마을 건립 사업에 대한 꿈을 얘기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준모 기자

 

백씨 부부가 세상에 알려진 건 지난해 5월이다. 당시 이들은 비영리 공익재단인 ‘푸르메재단’에 10억원을 기부해 화제가 됐다.

 

부부는 1998년 6월 영국 여행 중 불의의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부부는 크게 다쳤다. 특히 부인 황씨는 두 달 반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다 깨어났고 왼쪽 다리는 절단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해자 측 보험사가 백씨 부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소송을 벌이는 바람에 보상금도 지난해에야 겨우 받았다. 부부는 피해 보상금 107만5000파운드(약 20억원)의 절반을 뚝 떼내 재단에 기부했다. 기부한 돈이 장애인 재활전문병원 설립에 쓰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매년 30만명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후천적 장애인이 되지만 우리나라엔 이들의 재활을 도울 병원이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고 병상도 4000개에 불과해요. 그러다 보니 재활병원에 입원하려면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고 어렵게 입원하더라도 대기자가 너무 많아 2개월 만에 퇴원해야 합니다. 명색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현주소입니다. 당연히 재활병원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에 앞서 내 지갑부터 연 것입니다.”

◇백경학씨(맨 오른쪽)가 지난달 29일 지인들과 공동 운영하는 맥주전문점 ‘옥토버페스트’ 서울 종로점에서 푸르메재단 공동대표 강지원 변호사(가운데)와 함께 ‘천원의 만찬 협약식’을 가진 뒤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 옥토버페스트는 오는 6월 말까지 고객이 주문하는 1000원짜리 저녁식사 매출 전액을 푸르메재단에 기부한다.푸르메재단 제공

백씨 부부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부부가 거액의 돈을 기탁한 이후 푸르메재단에는 지난해부터 기부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기부자는 노후자금으로 쓰려고 간직해 둔 3억원 상당의 토지를 재단에 기증한 노부부, 장애극복상으로 받은 수상금 1000만원을 기부한 장애인 등 다양하다. 매달 1만∼2만원씩 꼬박꼬박 보내는 ‘개미 기부자’도 상당수이다.

황씨는 “상당수 기부자는 가난과 질병을 직접 경험하거나 경제적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하지만 이들의 마음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들”이라고 말했다.

교통사고는 부부가 인생의 모든 목표를 재활병원 설립에 두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 중앙일간지 기자 출신인 백씨는 2001년 말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돈을 벌어 재활병원을 직접 짓겠다는 각오에서였다. 아는 사람과 돈을 모아 옥토버훼스트란 맥주전문점을 운영했는데 장사가 제법 됐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본격적인 재활병원 설립 작업을 위해 사회사업가로 변신했다. 맥주전문점 지분(2억5000만원)을 몽땅 기부해 김성수 성공회대학 총장을 이사장으로 하는 공익재단을 설립했다. 부부가 지난해 10억원을 기부한 바로 푸르메재단이다.

백씨는 “푸르메는 ‘늘 푸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며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재활병원을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 목표는 2009년까지 50병상 규모의 재활전문병원을 착공하는 것이다. 이 일이 이뤄지면 2012년까지 150병상 규모의 병원을 세운다는 2차 목표도 세웠다. 백씨는 “병상당 2억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볼 때 330억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며 “그 돈이면 언제든 환자의 부름에 늘 응답할 의료진의 간병을 받을 수 있는 재활병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씨 부부는 이런 목표에 한발씩 다가가고 있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많다. 특히 재활병원을 지을 만한 땅을 확보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백씨는 “서울시나 경기도와 같은 지자체가 저소득 장애환자들이 재활을 꿈꿀 수 있는 병원 부지를 제공하고 중앙정부와 기업, 사회단체가 이들을 돕는 데 발벗고 나서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백씨 부부는 이런 계획이 실현된 뒤 대규모 ‘재활마을’을 만들겠다는 장기 목표도 세워 놓고 있다. 재활 관련 시설이 우리보다 한참 앞선 일본 고베(神戶)시의 ‘행복촌’을 성공 모델로 하고 있다. 행복촌은 60만평 규모의 재활마을로, 병원뿐만 아니라 각종 노인시설이 들어서 있는 복합단지이다. 독일 베를린시에 있는 재활센터도 벤치마킹 대상이다. 이곳엔 병원과 학교 등 대형건물이 60여개 동이나 들어서 있고 장애인 2000여명이 살고 있다.

“우리에게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장애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고를 당한 직후엔 가해자를 원망하기도 했고 세상도 싫어졌습니다. 하지만 재활병원을 세워야겠다는 목표가 생기면서 달라졌습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편해졌습니다. 반드시 재활병원을 설립해 우리 사회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백씨의 당찬 목소리에서 재활병원과 재활마을을 짓겠다는 게 꿈만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김준모 기자 jmkim@segye.com

2007.01.10 (수) 2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