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노컷뉴스]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멋지다고 해 40년된 모자 아직 꿰매 써"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멋지다고 해 40년된 모자 아직 꿰매 써"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김성수 총장
매일 오후 4시 5분에 방송되는 CBS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는 14일 창사 52주년 특집으로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을 초대해 파란만장했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 요즘 근황이 어떤가?
▲ 조금 건강이 나빠졌다.혈관이 막혀서 혈관 속에 피가 잘 통하는 수술을 한 지가 두 달 정도 되었는데도 기운이 없고 다리가 후들후들하다.노쇠 현상이 일어난 것 같다.
- 고향이 강화도다.1889년 영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들어와서 활동하던 곳이라, 할아버지가 바로 성공회에 귀의하셨다는데 ?
▲ 옛날에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꼭 자기 것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래도 새로운 것에 귀를 귀울이는 분이 있었다는 느낌이다.덕분에, 내가 오늘 이렇게 성공회 주교도 된게 아닌가 싶다.그 때 얘기를 들으면 지금으로선 상상을 할 수가 없다.그 때 강화읍에 성공회가 하나 있었고 온수리에 하나 있었는데 초기에는 강화읍까지 교회를 다녔다.자동차도 없고 그러니 새벽 4시면 바가지에 밥 싸서 성당에 걸어다니고 그랬다.그게 40리 됐는데 할아버지가 온 가족을 이끌고 열심히 다니셨다.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치신 것도 많을 것 같은데?
▲ 어머니한테 감사하는게 내가 그 당시 중학교 6학년 때 춘천에 가서 아이스하키 시합을 하는데 각혈을 막 했다. 한번 각혈을 하면 농담섞어 거의 바가지 단위로 피를 쏟아서 서울에 갔더니 의사가 폐병 삼기라고 해서 그때부터 쉬기 시작했다.그리고 한 10년 가까이 쉬는데 어머니가 '네가 아무리 아파도 회복기에 들어섰고 앞으로는 대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못할꺼다'하시면서 나를 단국대에 입학시키셨다.성공회 신학대는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들어가서 어머니가 대학교 졸업장을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으면 신부도, 주교도, 여기 나와서 인터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 어렸을때 부터 보이스카웃, 해양소년단 등 운동이란 운동은 다 했다는데?
▲ 내가 다녔던 교동 국민학교가 보이스카웃을 했는데 일제 말엽이라 1년밖에 못했다.보이스카웃이 없어지고 해양소년단이 생겨 한 2년 하고, 중학교 2학년 가서 해방이 되었으니 짧은 시간이었다. 또 그때는 일제시대니까 군사훈련을 국민학생도 시켰었는데 거기 그만 놀아나는 바람에 공부를 소홀이 해서 성적이 점점 떨어졌다. 그래서 배재중에 갔는데 그 덕분에 성직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직접 아이스하키팀도 만들었다는데?
▲ 친한 친구 하나가 아이스하키를 잘 알아서 같이 했다. 재미있는건 그 때 아이스하키를 시작한지 2년 밖에 안되었는데, 당대 명문인 휘문중학교랑 붙어서 11대 1로 졌다. 그런데 그 해 겨울이 끝날 무렵 최종 선수권대회를 하는데 우리가 휘문을 이겼다.그때는 아이스하키 하면 다들 잘 몰랐는데, 인상에 남는 것은 김구 선생이 구경을 자주 하셨다.기골이 참 장대하셨는데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쓰고 보고 계신걸 보면 참 멋있었다.
- 방금 모자 얘기 했는데, 쓰고 온 모자에 왜 그렇게 꿰 맨 자국이 많나?
▲ 한 40년 된 모자인데 동생이 미국에 가서 제일 먼저 사서 보낸거다.너무 오래 쓰다보니 해져서 잘 찢어지는데 버리긴 아까워서 꿰매 쓰고 있다. 이 모자만 쓰면 다들 멋있고 좋다 해서, 더 잘 꿰매쓰고 있다.
- 한국전쟁 때는 폐병 3기라고 했는데, 징집도 안되었나?
▲인민군이 군인을 뽑으러 다녔었는데 '저 집은 폐병쟁이, 저 집에 들어가면 재수 없고 전염된다'하는 인상이 있어서 잡으러 오지 않았다. 석달동안 밥먹을 때랑 화장실 갈 때만 일어났다. 그게 병을 낫게한 고비가 되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폐병 하면 덮어놓고 가만히 있어야 (낫는다고) 했다. 그 때는 스트렙토마이신 같은 약도 별로 없고 비쌌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그런 약이 돌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병 때문에 재산을 너무 탕진시켰다. 좋다는 병원 가고, 좋다는 약 먹고, 좋은 음식 먹고 했으니... 옛날에는 그렇게 큰 병을 앓으면 (집안이) 기우뚱했다. 아마 내가 누워있지 않았다면 몇번 망해도 망했을 것이다(웃음). 전쟁에도 끌려가고, 장사한다고 없는 집안에 돈도 꽤 썼을꺼고 동네 사람들도 꽤나 괴롭혔을 것이다.
- 투병생활이 끝나고 나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수원지점에 근무하기 시작했다는데?
▲ 그게 아버지 혼자 한게 아니라, 주식회사였다. 새끼줄 꼬아서 만든 쌀포대 같은 것을 사고 팔고 하는 회사였는데 여러 군데 있었다. 내가 몸이 낫기 시작하니까 수원지점에 가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먹고 잘 데가 없어서 수원성당 보육원에 빈 방이 있어서 거기서 살았다
- 그러가다 1964년에 성공회 신부 서품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지금 아내가 된 영국인 프리다 여사를 만나게 되는데, 일본에는 어떤 일로 갔고 어떻게 만나게 됐나?
▲ 그 사람도 영국에서 온 선교사였다. 일본도 올림픽 하기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랑 거의 비슷했다. 촌 청년들을 교회로 불러모아서 예수도 믿게 하고 편의시설도 제공하고 그랬다.거기 가서 청년 문제 세미나를 하다가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는 영어를 잘 못해서 말이 안 통해 손짓 발짓 다했다.
- 그리고 나서 39세가 돼서야 결혼을 결심했는데?
▲ 몸도 안좋고 해서 결혼은 안할려고 생각했다. 일본에 갈 무렵만 해도 결혼을 안하고 수사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다. 일본 수사원에 가서 한국에도 수사원을 만들자 했더니 거절당했다. 그런데 거절당한게 아내를 만나게 한 것 같다. 결혼 전에 강화도 고향에 있는 전등사의 조그만 방에 머물었는데 절이라 화장실이 꽤 멀었다. 이 여자가 이런데서 살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다 좋다 그러더라.그러다 보니 나도 좋고 서로 좋았는데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양쪽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결국 진정이 돼서 결국 결혼식을 정동에서 했는데 일본에서 주교도 여러번 오고, 아주 성대했다. 그 때 (조)영남이 (송)창식이 (윤)형주가 와서 축가도 부르고 그랬다. 그 땐 서로 무명시절이었으니까 무명시대끼리 모인 셈이다
- 1987년 서울대교구장 시절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맞이하게 됐는데
▲ 격동의 시기였다.그 때 성공회 신부들이 앞서가는 얘기도 하고, 이거는 좀 바꿔야겠다 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관심도 많았다. 6.10대회때 시청 앞에서 대회를 크게 열어야 되겠다 하고 있었는데 정부에서 알아서 방해했다. 그 때 우리 성당에서 선언문도 만들고 그래서 각 신문마다 나고 그랬다. 성공회가 제일 유명했던게 그때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 다른 신부님들이 고생했지 나는 별로 한게 없다. 마치 내가 다 한 것처럼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 평소에 좋아하는 성경 한구절 부탁드린다.
▲ 근래에는 주기도문 속에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다.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일도 많고 나쁜 일도 많은데, 어서 우리가 세상에 천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더 열심히 땅에서 이루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하면 하나님도 감동하셔서 통일도 되고 빈부의 격차도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요새는 그 성경 구절이 너무 좋다"
데일리노컷뉴스 정리/이승호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