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우리는 왜 뛰는가

우리는 왜 뛰는가

[뛰어보니] 싱가포르국제마라톤 그들이 ‘달리는 이유’


» 지난 3일 열린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출발선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 태극기를 등에 건 사람도 볼 수 있다. 구본권 기자

한국선 4시간45분 넘어서면 버스와 달려야 하는 국제대회 많아

 다행히 기온은 아직 예상만큼 높지 않다. 5시30분이 되자,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하던 주자들이 출발선으로 모여든다. 케냐 출신의 ‘검은 탄환’들이 엘리트선수를 위한 맨 앞자리에 배치된다. 기록에 따라 출발선이 지정된다. 한국과 달리 6시간 이후의 주자들도 대회에서 ‘기록 인정’이 되는 것이다. ‘6시간 이후 주자들’을 위한 안내판이 있는 것이다.

 서울서 열린 국제마라톤에 두 번 참석했다가 5시간 근처의 기록을 낸 덕분에, 차량통제가 풀린 도로에서 버스와 승용차들과 함께 달리다 그마저도 안돼 인도로 올라가 달렸던 경험이 있는 기자에게는 각별한 배려로 보였다.

 “....쓰리, 투, 원. 와~”

 어둠 속에서 함성과 함께 러너들이 뛰쳐나갔다. 야자수 가로수가 늘어서고 플루메리아 꽃이 고운 거리 속으로 러너들의 긴 물결이 흘러가고 있었다.

 교통의 요충지로 일찍부터 국제도시로 자리잡은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국제마라톤대회는 더위와 습기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대회다. 5회의 역사에 불과하만, 참가자가 전세계로부터 쇄도하고 있다. 2002년에 6000여명 수준이던 대회 참가자가 해마다 40~50%씩 증가해, 올해는 주최쪽에서 예상한 인원을 넘어 3만1천여명에 달했다. 국제대회에 참가할 정도의 마라톤 마니아들이라면 으레 좋은 기록과 즐거운 달리기를 목적할 터이지만, 싱가포르 국제마라톤은 사정이 다르다. 적도 위의 열대도시에서 아무리 열심히 달려봐야 자신의 기록을 앞당길 사람도 없고, 한증막 속 마라톤이 즐겁다고 하기도 어렵다.

왜 그들은 달리는가?

왜 달리나? “새가 날 듯 사람은 달린다”

  

» 싱가포르국제마라톤. 그들이 ‘달리는 이유’ . 구본권 기자

달리는 이유에 대한 달리기 철인들의 정의도 다양하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에밀 자토펙)고 하는가 하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영원을 잠시 맛볼 수 있다”(조지 시언)고 말하기도 한다.

싱가포르마라톤에서는 상당수의 러너들이 그 이유를 자신의 등에 고백하고 달렸다. 한 스포츠용품회사의 마케팅 수단이기도 했지만,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왜 달리는가”를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뭔가 타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내 지방이 타는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자신이 달리는 이유를 쓴 러너로 부터 ’돼지도 날수 있다’ ‘변명과 싸우기 위해’ 는 등의 다양한 글귀가 등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 자신이 속한 마라톤클럽과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을 대부분 새겨놓곤 했는데, 이들의 글귀는 좀더 친근감이 갔다. 사람들의 생각만큼이나, 러너들의 이유도 다양했다.

그런데, 그런 숱한 ‘이유’를 압도한 사람은 등에 써붙인 ‘Reason’이 아니었다.

싱가포르의 요즘 일출시각은 6시54분. 서서히 어둠이 걷히며 동쪽하늘로부터 새벽빛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풀코스에 뒤이어 하프 주자로 출발했지만 몇몇 풀코스 주자들은 하프 러너들에게 용기와 격려와 함께 주로를 내어주고 뒤로 물러선다.

36살 리마를 만나다. 그녀는 풀코스 위에 올라온 노새?

 

» 폐타이어를 끌고 달리는 리마 채이(Rima Chai). 구본권 기자

 2~3km를 달리다보니 주로에서 깡통 끄는 소리가 들린다. 한 백인 여성이 허리에 끈을 묶어 타이어와 스티로폼상자, 페트병, 깡통을 끌면서 뛰고 있다. 여성은 힘차 보였지만, 7~8kg은 족히 될 폐타이어를 끌면서 가니, 힘에 부쳐 하프러너 대열 속으로 처지고 있다.


» 12km 지점에서 다시 만난 리마 채이, 스스로 고행을 통해 환경에 대한 이슈를 알렸다.

달리기 퍼포먼스인가, 자이나교 수행자처럼 고행을 하는 것인가?

달려가 물었다.

-왜 이렇게 하고 뛰는가?

=심각한 환경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 12km 지점에서 다시 만난 리마 채이, 스스로 고행을 통해 환경에 대한 이슈를 알렸다.

-이름이 뭔가?

=리마 채이(Rima Chai)다.

-당신은 풀코스 주자인데, 이렇게 하고 완주하나?

=물론이다.

-내가 보기엔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얼마나 예상하나

=반드시 골인하겠다. 8~9시간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리마 양쪽 옆에서 함께 뛰고 있는 빨간티의 두 여성이 “우리는 꼭 해낼 것”이라며, 만약 “우리가 완주해서 들어오면, 그때는 네가 우리에게 오늘 저녁을 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올해 36살의 리마는 싱가포르 국적의 IT프로그래머로, 환경 보호를 위해 우리가 관심을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리마는 2009년에는 아시아여성 최초로 북극에서 남극까지 여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도 하다.

» 지난 3일 열린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에서 완주한 주자들이 기뻐하며 골라인을 통과하고 있다. 구본권 기자

리마를 뒤로 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한 시간 뒤쯤 12km 지점에서 뒤의 행렬과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시 리마를 볼 수 있었다.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힘들게 고개를 숙이고 짐승처럼 폐타이어를 도로 위로 끌면서 걷듯 뛰고 있었다.

리마는 결국 승리했다. 싱가포르 최대의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4일치 1면에 리마의 사진을 싣고, 리마가 7시간39분 걸려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보도했다.

“왜 뛰는가”를 말해주는 고통속 환희

더위 속에서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앞으로 뒤로 뛰다보니, 2시간30여분이 지났다. 몸에는 땀이 소금결정이 되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골인 지점을 넘어서자 함께 취재온 일행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니시라인을 밟은 러너들이 고통 속에서도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다양한 ‘달리는 이유’들을 뛰어넘는 공통의 답변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