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오늘] 언론사에서 비영리재단으로 [미디어 오늘] 2006-06-08

[삶의 재발견(10)] CBS·동아일보 출신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미디어오늘 선호 기자]

 

바둑판 중 최고로 치는 것이 비자나무 바둑판이다. 비자나무는 습기가 차면 잘 비틀어지고 틈이 벌어져 다루기 쉽지 않은 목재다. 그럼에도 유독 바둑판에서 비자나무를 최고로 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잘 비틀어지고 벌어지는 특성 탓이다.

▲ 이창길 기자 photoeye@

비자나무로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재를 물에 재운 뒤 그늘에서 말리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비틀어지고 틈이 벌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수없이 되풀이되다 보면 다른 목재로는 흉내낼 수 없는 탄성과 복원력을 가지게 된다.

특히 벌어졌던 틈새가 다시 되붙는 과정에서 마치 흉터와 같은 자국이 남게 되는데 이런 자국이 많은 바둑판일수록 많은 단련을 거쳤다해서 더욱 고가로 거래된다.

삶의 값어치를 매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바둑판에 대비할 때 ‘닥쳐온 고난과 상처를 어떻게 이겨냈느냐’야말로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푸르메 재단의 백경학(43·사진) 상임이사는 바로 이러한 전형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다.

언론계에서 백 이사는 창업에 성공한 기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2년 양조맥주홀 '옥토버훼스트'를 창업해 서울 강남과 종로에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백 이사는 언론인 전직의 가장 모범적 사례였다. 그런 그가 지난 해 3월 ‘옥토버훼스트’의 사장직을 내놓고 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재단법인 푸르메 재단의 상임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과 가족에게 닥쳐온 시련 앞에 무릎꿇지 않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CBS를 거쳐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던 백 이사는 지난 1998년 외국에서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연수차 독일서 머물다 아내 황혜경씨와 함께 영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갔다가 자동차 트렁크에서 물건을 꺼내던 황씨를 다른 운전자가 덮친 것이다. 수개월에 걸친 혼수상태를 거친 끝에 아내는 왼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일에서 1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를 받다 귀국한 이후 백씨 부부는 열악한 국내 의료여건이라는 또 다른 역경에 직면하게 됐다.

“15평 남짓한 4∼5인 병실에 간병 온 식구들까지 부대껴가며 치료를 받아야 했죠. 그나마 입원을 위해서는 2∼3개월 동안 대기해야 하는데 2개월 가량 입원하면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상황이었죠.”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부인 황혜경씨(백 이사 오른쪽)와 푸르메재단 직원들. ⓒ이창길 기자 photoeye@

우리나라에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470만 명의 장애인 중 65%는 교통사고, 뇌졸중, 지체장애 등으로 인해 입원치료와 지속적인 재활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 2%만이 입원치료 등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는 열악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통받은 백 이사는 지난 해 재활치료병원 건립을 위해서 설립된 푸르메 재단에 투신, 자신이 보유했던 2억5000만 원 상당의 ‘옥토버훼스트’ 주식과 교통사고에 대한 우선피해보상금 1억 원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이어 지난 달에는 8년 소송 끝에 받은 피해보 상금 107만 파운드(한화 19억 원) 중 소송비용 등을 제외한 50만 파운드(9억 원)를 푸르메 재단에 쾌척했다.

 

“50병상 규모의 1단계 병동 설립에 들어가는 예산을 150억 원 정도로 보고 있는데 현재 재단에 적립된 기부금이 13억 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처럼 지자체가 부지를, 자동차회사 등 기업이 비용을, 개인들이 봉사활동을 제공하는 협력모델이 나온다면 제대로 된 재활병원설립도 그저 꿈만은 아닐 겁니다.”

 

백 이사는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도 지사 등 지자체장은 물론 현대나 기아와 같은 기업까지 두루 접촉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소수인 장애우, 그 가운에서도 소수인 장애환자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까닭에 일의 진척은 더디기만 하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 가장 결정적인 도움은 결국 언론,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방송의 관심이라고 백 이사는 말한다.

 

“저도 기자 출신이지만 사회적 여론형성을 위해서는 결국 지상파가 움직여줘야만 합니다. 국내에서 해마다 30만 명이 후천적 장애우가 되고 이 가운데 30%가 재활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형식적인 단발성 보도가 아닌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장애환자에 대한 기획보도의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기자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그리고 사회사업가로 이어온 백 이사의 여정은 그 자체로 값지다. 그러나 그 값어치는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시련과 상처를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이겨내 왔다는 점에서 더욱 빛나고 있다.

 

 

푸르메재단은?

 

‘푸른 산’을 의미하는 푸르메재단은 늘 푸른산처럼 재활의 의지가 있는 교통사고·뇌졸중 등 후천적인 장애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인간적인 병원’을 목표로 지난 2005년 설립됐다. 도심 한가운데 콘크리트로 된 고층병원이 아니라 환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가 하나가 돼 환자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병원, 불러도 대답 없는 병원이 아니라 늘 환하게 응답하는 선진화된 재활치료시설 건립을 위해 올해 안에 부지선정을 마치고 2008년 착공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이사장인 성공회대학 김성수 총장과 강지원 변호사, 김성구 샘터사 대표, 김용해 예수회 신부,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안국정 SBS 사장, 원택 스님, 이상기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이정식 CBS 사장, 조인숙 건축사 사무소 다리건축 대표, 김문규 명지대 겸임교수 등이 백 이사와 함께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푸르메재단은 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바자회, 사진전시회 등을 개최해 왔으며, 지난 달 6일에는 한빛 맹학교 합창단 학생들을 옥토버훼스트에 초청해 기념행사를 갖기도 했다. 현재 사무실은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으며, 백 이사를 포함해 7명의 상근자가 일하고 있다.

문의: 02)720-7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