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식품 유효기간 있듯, 하고픈 일도 때가 있죠”

“식품 유효기간 있듯, 하고픈 일도 때가 있죠”

 

» 바다위 새해맞이 행사에 참가한 농학교 학생들.

장애인 15명 난생처음 ‘새해맞이’ 하러 한산도 바다 위로

한 해가 저무는 동시에 새로운 해가 밝아온다. 새로 밝아오는 해를 맞아 누구나 묵은 감정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소망을 품는다. 새 희망을 가꾸기 위해서 사람들은 연말 연시가 되면 새로운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연말 연시에 ‘신년 구상’과 ‘새해 새 꿈’을 위해 멀리 떠날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남들보다 몸이 불편한 해 쉽사리 몸을 이동할 수 없는 장애인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세밑과 새해 벽두에 송년과 새해맞이로 들뜨는 세상을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바라보고 부러워하던, 장애인들이 힘들게 나들이에 나섰다. 겨울바람이 차가운 바다 한복판으로, 세상을 맞으러 나섰다.

난생 처음 본 겨울바다 위에서 ‘조용한 수다’

“저는 대학에 가서 공부하면 되지만 친구들은 사회에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일 해맞이 때 이런 소원을 빌 거예요.”

서울농학교 졸업반 박혜원(18)양은 12월27일 오후 거제도 한산도 앞바다에 있는 천연 굴 양식장을 견학하기 위해 작은 배에 오르는 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박양은 이번 입시에 대구대학교 디자인학과에 합격했지만 함께 공부했던 대부분의 농학교 친구들은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까닭이다. 풍랑이 거센 겨울바다 위에서 난생 처음 올라선 박양은 두고 온 친구들에 대한 미련이 앞섰다.

통역을 맡은 김민(26) 교사가 뱃전에서 학생들에게 소감을 묻자 박양이 먼저 손가락을 이용한 수화와 얼굴 표정을 통해 흥분과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이날 따라 심술궂은 바람이 불면서 파도가 뱃전에 물벼락을 쏟아놓았다. 물벼락에 놀람도 잠시. 난생 처음 굴 양식장을 돌아본다는 기쁨에 서울농학교 학생 6명은 ‘조용한 수다’를 떠느라고 손가락이 분주했다.

» 최기창(60)씨와 부인 차제엽(52)씨. 이 부부로서는 27년 만에 바다나들이를 나선 ‘일대 행사’였다. 최씨는 3살때 소아마비로, 부인 차씨는 열다섯살때 뺑소니차에 치여 오른쪽 발목을 절단한 뒤 불편한 세상과 마주해왔다.

이들 옆에선 한 쌍의 부부가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살 때 소아마비 장애를 갖게 된 최기창(60)씨와 부인 차제엽(52)씨였다. 이 부부에게 이날 나들이는 1979년 이후 27년 만의 ‘일대 행사’였다. 열다섯의 나이에 뺑소니차에 치여 오른쪽 발목을 절단한 차씨는 “남편과 처음으로 배를 타니 감회가 새롭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에는 ‘파도가 겁이 난다’며 8톤 디젤선의 선실에 숨어 있던 농학교 김혜선(18)양도 배가 한산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굴 채취뗏목에 도착하자 사람들 틈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밧줄에 끌려 바다 속에서부터 굴이 딸려 올라오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푸르메재단이 마련한 ‘2007년 희망여행’이다. 서울농학교 졸업반 학생들과 서울장애인자립센터, 절단장애인협회, 프랜드케어, 큰날개 등 5개 단체에서 15명이 ‘희망찾기’에 참석했다. 몸이 불편한 이들의 이동을 돕기 위해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이사와 임상준 팀장, 중앙씨푸드 직원들이 도우미로 참가했다.

장애인 초청한 장석 사장 “식품 유효기간 있듯, 인생에서 좋은 일도 유효기간 있어”

이 행사는 수익의 1%를 푸르메재단에 기부하고 있는 굴양식회사 중앙씨푸드의 초청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이 회사 장석 사장은 “평소 여행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자연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로 초청했다”며 “앞으로 이런 행사를 정기화해 눈과 입이 행복한 여행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장 사장은 “사회공헌이라는 것이 꼭 대기업만의 몫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사회에서 좋은 뜻을 실천하는 일은 지방의 중소기업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취지를 밝혔다.

장 사장은 또 “평소 누구나 좋은 일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지만, 그 시점은 ‘우선 돈을 많이 벌고’ 기업 같으면 ‘크게 성장해서 수익이 많아지면’으로 미뤄진다. 그렇지만 식품에도 유통기한이 있듯이 인생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것 같다”며 “유효한 일은 하기에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27일 오전 서울을 출발해 거제도 둔덕면에 도착한 이들은 바다 굴 양식장을 견학한 데 이어 중앙씨푸드 굴가공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직접 굴을 까보기도 했다.

무형성증 장애(사지절단 장애)에 불구하고 지난해 로키산맥을 등정한 데 이어 올해 장애인 수영대회에서 자유형과 배형 50m에서 금메달을 딴 김세진(10)군은 “난생 처음 굴 양식장을 둘러보고 굴도 직접 까게 돼 너무 행복하다”며 “다른 친구들도 이런 행사에 많이 참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각각 다른 장애와 사연을 지녔지만 새해를 맞는 꿈은 한가지였다. 참가자들은 28일 아침 거제도 몽돌 해수욕장에서 새해 소망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바다를 향해 날려보내며 다가오는 새해를 맞았다. (이 기사는 푸르메재단 임상준 팀장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 제공 푸르메재단)

<한겨레>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