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내년 은퇴 앞둔 '영혼 건축가'김 성 수성공회大 총장

[이사람의삶]내년 은퇴 앞둔 '영혼 건축가'김 성 수성공회大 총장

"더 낮은 곳에서 장애인과 함께할 것”


“총장직에서 은퇴하면 2000년 강화도에 정신지체장애인 자립을 위해 건립한 ‘우리마을’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여생을 보낼 계획입니다.” 평생을 장애인 등 소외된 불우이웃과 함께 해 온 ‘영혼 건축가’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성수(78) 주교의 낮은 곳을 향한 ‘구도의 길’은 끝이 없는 듯 하다. 1년여 뒤면 은퇴하는 김 총장이 부인 프리다(75) 여사와 함께 돌아갈 ‘우리마을’은 2000년 3월 정신지체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강화도 온수리에 있는 선산에 건립한 정신지체장애인 직업생활공동체다.

 인천 강화도 출신인 김 총장은 할아버지부터 아들까지 4대가 성공회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드물게 개방적이었던 할아버지가 성공회에 귀의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김 총장은 어머니가 교육에 열정을 가진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여유 있는 가정환경이 아니면서도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과 정성 덕분이었다는 것. 서울 교동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개구쟁이였던 그는 공부보다는 학교 특별활동 등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 덕분에 보이스카우트와 군사훈련 대대장까지 해보았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8세 때 폐결핵을 앓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배재중에 입학한 후 해방이 돼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부를 만들어 창경원 특설 링에서 시합을 했어요. 그런데 경기 도중 갑자기 각혈을 하고 쓰러진 거예요. 폐결핵 3기 진단을 받아 거의 10여년 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요양을 했어요. 다행히 온 가족의 정성 어린 기도 덕분에 병이 나았는데, 이때 부모님과 친지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부가 됐어요.”

연세대 신학과를 수료한 후 그는 성공회 신부가 되기 위해 ‘성미가엘 신학원’에 입학했다. 신학원 재학 중에는 탄광촌과 영산강 간척사업 현장을 찾았다. 노동자의 삶을 알기 위해 위장취업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성공회대 안에 있는 정신지체장애아 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맡게 됐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뒤 이들이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선산인 온수리 땅에 ‘우리마을’을 건립했다. 장애인과의 삶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성베드로학교 교장과 우리마을 원장을 맡아 10여년 동안 정신지체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축복이자 행운”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삶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는 노정이었다. 교회 목회 10년, 성베드로학교 운영 10여년, 성공회 주교 10년, 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남북기독교자회의 회장(스위스 글리온),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이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고문, 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 고문, 사회연대은행 이사장, 푸르메재단 이사장, 한국YMCA후원회 회장, 성공회대 총장 등이 그의 이력이다.

그래서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울림이 큰 사람’, ‘언제나 평화스러운 웃음을 띠고 손을 내미는 사람’, ‘장애인들의 대부이자 우리 시대의 큰 스승’ 등으로 불린다.

푸른눈의 영국인 처녀였던 아내 프리다 여사는 64년 성공회 신부 서품을 받고 일본 수사원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 당시 프리다 여사는 영국 성공회에서 파견된 선교사였다. 김 총장은 원래 결혼하지 않는 수사가 되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수사원에게 한국에도 수사원을 만들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실망과 고민을 할 때 프리다 여사가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었다. 이후 프리다 여사는 김 총장의 ‘평생동지’가 됐다.

동양 남자와 서양 여자가 만나 살아온 지 벌써 36년. 하지만 그는 가정에서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는 되지 못한 것 같다고 겸연쩍어했다. 프리다 여사는 7년 전 정신지체아를 위한 장난감도서관인 ‘레코텍’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설립해 ‘특수교육의 선구자’로 불린다.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그의 가족은 93년까지 여의도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러나 대주교가 되면서 뜻밖의 요구에 부딪혔다. “대주교라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성공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이의 집이 겨우 24평이라니 어디 손님 한번 제대로 치르겠느냐”며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94년에 현재 살고 있는 48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도배 한 번 안 한 채 10년을 살고 있다고 했다. 한 달 생활비를 물으니 “150만원가량 든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집에 돈을 가져가지 않았어요. 아내 월급으로 살림을 꾸렸는데 지난해 여름부터는 아내도 나이가 많아 더 이상 돈을 못 벌어 어쩔 수 없이 월급을 타 생활하고 있어요.”

김 총장은 장인 어른이 물려준 90년 된 양복을 지금도 입고 다닌다. 소매 끝과 앞섶에 얇은 가죽을 덧댔는데, 영국인 장인이 그렇게 입은 것을 결혼식 무렵 물려받아 지금까지 입는다고 했다. 검은 제복은 40년이 넘었다.

평생 받은 월급과 옷 한 벌 안 사 입고 모은 돈은 모두 불우이웃을 위해 쓰였다. 성베드로학교, 음성한센인복지시설인 ‘성생원’, 맞벌이 신도를 위한 양육시설 ‘나눔의집’, 그리고 김 총장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기증해 강화에 마련한 ‘우리마을’ 건립·운영 등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학생들은 김 총장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특히 점심식사 때 식권이 없는 학생들은 그를 찾아와 서슴지 않고 식권을 받아간다. 그래서 그는 식권을 항상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우리 학교 이념이 ‘열림, 나눔, 섬김’이에요. 한 사람의 특별한 지도자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열 사람의 평민을 양성하길 원해요. 획일적인 질서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성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인성과 좋은 성품을 갖춘 사람이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어요.”

그는 이론적으로만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예수님이 왜 아픈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녔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답이 나와요. 그렇게 답을 찾으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지 않고는 못 배겨요.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해요. 예수의 사랑의 실천을 무겁게 생각해야 합니다.”

김 총장의 꿈은 정신지체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재활전문병원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푸르메재단(www.purme.org)을 만들었다.

“내가 남은 생애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적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정신지체장애인과 장애환자들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재활병원과 보금자리를 건립하는 겁니다.”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된 지 올해로 43년째인 김 총장은 “정부나 기업체로부터 학교발전기금을 많이 유치해 첨단연구실도 짓고 학생들 장학금도 많이 주어야 하는데 돈 끌어오는 재주가 없어 학생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웃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약력 △인천 강화군 온수리 출생(78) △배재고·단국대 정치학과 졸업·연세대 신학과 수료·영국 셀리오크신학대학 수료·연세대 명예신학박사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 대주교 △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남북 기독교자회의 회장(스위스 글리온)△대한성서공회재단 이사장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성공회대학교 총장

글 박석규 기자, 사진 김창길 기자 skpark@segye.com

2007-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