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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덤벼라, 세상아! 우린 당당할테다!

 “덤벼라, 세상아! 우린 당당할테다”

소설가 박완서와 함께한 장애우들의 ‘희망 2009’ 외침
장애 청소년 11명, 거제도서 ‘1박 2일’ 해넘이
소망담은 연날리기·창작詩 발표 등 뜻깊은 시간
거제=이훈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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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푸르메재단이 주최한‘장애 청소년과 함께 하는 2009 거제도 희망여행’에 참가한 장애우들과 재단 홍보대사 이지선(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씨 등 자원봉사자들이 해넘이 행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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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씨, 재단 홍보대사 이지선씨가 29일 장애 청소년들과 함께 굴 껍질을 벗기는 공장을 견학하고 있다.

30일 오전 6시50분 아침 해가 컴컴한 어둠을 걷어낼 채비를 마친 경남 거제시 학동몽돌해수욕장 해변에 40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장애를 가진 청소년들과 그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아이들 손엔 저마다의 새해 바람을 적은 연이 들려있었다.

지체장애가 있는 이승봉(12)군은 세 가지 소원이 담긴 연을 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세요’ ‘공부 열심히 하게 해주세요’ ‘우리가족 모두 행복!’ 내년 고3이 되는 청각장애우 최별(16)양은 ‘대학 잘 가서 대박 나길’이란 희망을 띄우려 좌우로 연신 뛰어다녔다.

유강현(16ㆍ청각장애)군의 연엔 비범한 솜씨로 그린 맹수의 붉은 눈빛이 형형했다. 새해 중학생이 될 이하늘(12)군도 휠체어에 앉아 연줄을 길게 뽑았다. 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침내 두터운 구름 위로 비죽 얼굴을 내민 해가 그 꿈들을 밝게 비췄다.

장애 청소년들이 한반도 남단 거제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푸르메재단이 29, 30일 주최한 ‘2009 거제도 희망여행’엔 청각ㆍ시각ㆍ지체장애우 11명이 참가했다.

푸르메재단과 아르코미술관이 지난 9월부터 12주 동안 진행한 ‘장애청소년 동화책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10대들이다. 이번 행사엔 원로 소설가 박완서씨, 전신화상을 극복하고 미국 유학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 중인 재단 홍보대사 이지선씨, 동화책 프로젝트를 지도했던 소설가 고정욱씨, 화가 이제씨 등이 함께 했다.

석 달 간 동화 창작 작업을 함께 했던 터라 29일 아침 서울에서 거제로 내려가는 버스 안은 처음부터 화기애애했다. 새해 수험생이 되는 동갑내기 최별, 박영지양은 만나자마자 수화를 섞어가며 진로를 화제 삼았다.

 

영지는 “요즘 영어 실력은 필수 요건이라는데 그래도 영문학과에 가는 게 좋을까”라며 의견을 구했고, 별이는 “특수교육학과에 가고 싶은데 (취업) 전망이 밝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두 여고생의 고민은 손에 와닿을 듯 현실적이었다.

서울농학교에 다니는 강창묵(18), 유강현군은 동화 프로젝트 때 미술 지도를 해준 선생님들과 필담을 나눴다. 강현이가 메모장에 한 여선생님의 모습을 근사하게 그리자, 선생님은 두 아이의 얼굴 스케치로 화답했다. 한 대학 만화창작과에 수시 합격, 내년 대학생이 되는 창묵이는 제 얼굴 그림 밑에 “창묵 아니에요, 실패!”라고 써서 웃음꽃을 피웠다.

수화 통역 차 행사에 참가한 임옥규 서울농학교 교사는 “어릴 때부터 안들리는 귀를 대신할 의사소통 수단을 강구하다 보니 그림에 뛰어난 학생들이 많다”며 “창묵이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학 합격 후 한참 동안 진학 여부를 고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행사 후원처인 굴 가공업체 중앙씨푸드에 도착한 일행은 박완서, 이지선씨의 강연을 들었다. 박씨는 “장애아가 있어 더욱 화목해진 가정도 많이 봤고, 반대의 경우도 많이 봤다”면서 “장애아를 애물단지가 아닌 복덩이로 받아들이고 키울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재활상담에 이어 사회복지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지선씨는 “유학 중 장애인 구호기관에서 인턴을 했는데, 도움 받는 일을 당당한 권리로 여기는 장애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공부를 마치면 한국에도 그런 풍토가 조성되도록 정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중학교 때 시력을 잃은 강형옥(17)양은 강연 도중 장애우를 대하는 사회의 무지와 미성숙한 태도를 당차게 비판했다. 시각장애 외에 자외선 노출시 온 몸에 멍이 드는 ‘쇼그렌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형옥이는 “하루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고 체육 활동을 하다가 증세가 나타났는데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내가 역병에라도 걸린 듯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옥이는 안마 수업을 받기 힘들어 자퇴했던 시각장애우 고교에 내년 복학할 거라며 “검정고시와 수능을 보고 싶어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재가 없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지는 해를 보고 싱싱한 굴 요리로 저녁을 먹은 뒤 학생들은 저마다 준비해온 시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 중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한 양하은(10)양은 점자 타자기를 짚어가며 ‘눈이 땅에게 잘 자라고 이불을 덮어주네 / 세상은 눈이불을 덮고 포근히 잠들었네’라고 낭독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이들 시엔 한결같이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형옥이는 ‘야생의 새를 새장에 가두려 하면 할수록 / 날개가 꺾이고 부리가 터진다’면서 자유를 부르짖었고, 고재현(16ㆍ청각장애)양은 ‘이 모습 이대로 청순한 모습으로 / 은은한 향을 피우는 꽃으로 살고 싶다’며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1등상은 <십대의 문>이란 시를 발표한 창묵이 몫이었다. ‘오~ 꽃다운 열 아홉 살 가고 스무 살 되겠네 / 3일 남았네! 정말 슬프다 슬퍼 // (중략) // 시간의 신을 우연히 만나면 / 시간을 멈추라고 뺨을 때릴거야 / 하지만… 그리스랑 한국은 머니까 못 때려주겠네 // 그래도! 스무 살의 세상에 당당히 들어가자! / 덤벼봐!’ “음악성, 회화성, 논리성의 3박자를 모두 갖춘 절창”이라는 강만수 시인의 심사평이 따랐다.

숙소로 가기 전까지 아이들은 이튿날 해돋이 행사 때 날릴 희망의 연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진지함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몰아냈다. 행여 방해될세라 바다마저 숨죽였던, 거제도의 푸른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입력시간 : 2008/12/31 03:23:42 수정시간 : 2008/12/31 03:2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