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글로 장애우의 희망되리라 - 노벨문학상 도전도 진행형'

<사랑 그리고 희망 - 2010 대한민국 리포트>

“글로 장애우의 희망되리라…노벨문학상 도전도 진행형”

‘사랑·희망 전령사’릴레이 인터뷰 - 책 인세 기부 고정욱 작가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기사 게재 일자 : 2010-04-21 13:46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휠체어를 밀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1급 지체장애인 동화 작가로, 동화 한권의 인세 전액을 장애인 재활전문 병원 설립을 위해 푸르메재단에 기부한 고정욱(50·사진)씨. 고씨의 휠체어 밀기는 어렵잖았으나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었다. 늘 다니던 계단 몇 칸만 오르면 되는 길을 놔두고, 한참을 돌아와야 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내리막길에서 휠체어는 마구 내리달릴 태세였고, 작은 앞바퀴는 나지막한 턱 하나 넘기도 어려웠다.

[인터뷰=김종락 문화부장]

우여곡절 끝에 편집국에 도착해 앉으니 고씨가 달래듯 말했다.

“이 정도는 양반입니다. 지금까지 50년 동안 매일 이런 일을 겪어 왔는데요, 뭐.”

지난 15일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고씨가 인터뷰 장소를 문화일보로 하자고 했을 때만 해도 바쁜 시간을 아낄 수 있겠다며 고맙게만 생각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워낙 밝고 힘차 그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간간이 보기만 하던 휠체어를 직접 밀어 보고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

“기회가 닿으시면 길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과연 휠체어가 다닐 만한 길인가. 장애인이 버스 한번 타는 것이 보통 사람이 거대한 암벽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답니다.”

―이렇게 살아오시면서 ‘암(癌) 탐지견 삐삐’(최정인 그림, 주니어 김영사)의 인세 전액을 장애인 재활병원 설립을 위해 내놓으셨군요.

“저뿐 아닙니다. 삽화를 그린 최정인씨는 화료 중 적잖은 금액을 일시불로 내놓았고, 출판사는 책이 한권 팔릴 때마다 500원씩을 내기로 했으니까요.”

―푸르메 재단과는 전부터 인연이 있었나요.

“재단이 설립된 2005년 즈음부터 회원으로 가입해 매월 일정액을 기부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이렇게 책 한권의 인세 전액을 내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백경학 푸르메 재단 이사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장애인에게 희망의 상징 같은 존재다. 장애인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당신의 재능을 기부해 달라.’ 이런 요청에 저뿐 아니라 화가와 출판사도 응한 겁니다.”

“전부터 스스로를 장애인에게 희망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지체장애인으로 자라며 꿈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돼서 저처럼 장애가 있는 이들을 고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인인 제게 그 꿈이 불가능하다는 걸 고3이 돼서야 알았으니 참 아둔했던 셈이지요.”

고씨에게 불가능한 건 의사가 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대안으로 생각했던 한의대는 물론이고, 이공계 대학의 문이 모조리 닫혀 있었다. 갈 수 있는 이과대학은 수학과뿐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되신 거로군요.

“그렇지요. 나와 익숙한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스스로 장애인임을 잊고 있었는데, 장애인임을 뼈아프게 자각한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장애인에게 삶은 참으로 쉽지 않구나… 그렇게 느끼게 됐죠.”

그러면서 고씨는 결심했다. 의사가 한 개인의 병을 치료한다면 나는 작가로서 사회의 병을 고치리라. 무엇보다 다른 장애인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그는 이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충격적인 좌절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운이 없었는가. 10년이 넘도록 작가 등단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신춘문예 철마다 열병앓듯 글을 써도 문턱에서 늘 미끄러졌다. 이런 와중에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 학위 논문 마무리에 바쁘던 1991년 초겨울, 그의 시선이 포기하다시피했던 신문 신춘문예 공모에 또 한번 머물렀다. 얼마 전 창간했던 문화일보 제1회 신춘문예 공모였다. 다시 열병이 도진 그는 논문 마무리 등에 바쁜 와중에도 그 동안 틈틈이 써 왔던 단편을 완성한다.

“1991년 12월 말, 당선을 알리던 전화를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문화일보 문학 담당 기자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해요.”

고씨는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1급 지체장애인으로 휠체어에만 의지하고 있던 제가 세상으로 날아갈 날개를 단 셈이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날개가 달렸다고 곧바로 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첫 소설이 좀 팔리는가 싶더니 다른 책에 대한 반향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다시 시작된 어둠의 긴 터널.

―그래도 글은 계속 쓰셨나요.

“글쓰기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글쓰기에 정말 미쳐보자.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혀 배수진을 치고 미친 듯이 읽고 썼지요.”

구원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1990년대 중반쯤, 자신의 아이에게 읽힐 동화로 직접 한번 써 본 작품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반향을 불러온 것이다.

“우리 또래의 부모들 누구나 그랬듯이 저도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려 애썼지요. 하지만 대부분 전집류나 만화영화를 베낀 조잡한 그림책이나 동화뿐이었지요. 이런 책 대신 읽히기 위해 한번 써 본 책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 겁니다.”

고씨가 처음 쓴 동화는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책은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형과 철없는 어린 동생을 소재로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췄다는 평을 받으며 수십만부가 팔렸다. ‘어어, 이거봐라’ 하며 잇따라 쓴 장애인 동화 ‘안내견 탄실이’가 또 수십만부나 팔렸다. 이어 ‘가방 들어주는 아이’,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 그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 셀러가 됐다.

장애인으로 누구보다도 장애인을 잘 아는 그에게 장애인을 소재로 한 동화는 ‘동화계의 틈새시장이자 블루오션’이었다. 더욱이 그에게 장애인 동화는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카타르시스였고, 아이들에게는 장애아와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가치를 선사하는 소중한 선물이기도 했다. 장애인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자 생각지도 않았던 일도 생겼다. 초·중·고교와 도서관, 각종 공무원 단체와 문화단체의 강연 요청이 쇄도한 것이다.

“흔히 장애인 하면 교육을 받기 힘들고, 그래서 안정된 직업을 갖기 어려우며 결혼도 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교육도 받고, 돈도 잘 벌고, 행복한 가정도 가지며 장애인으로는 드물게 성공했습니다. 장애인에게 희망 전도사가 되기 위해서라도 강연에 나서기로 했지요. 장애가 없는 이에게는 장애를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했고요.”

이렇게 강연을 시작한 고씨가 강연에 나가는 횟수는 최근 들어 연 100회를 넘는다. 인세와 강연료 수입이 쌓이면서 생활도 안정됐다. 그가 장애인을 위한 도서관인 새날도서관의 관장을 맡거나 국제장애인연맹 한국지부의 이사 등으로 장애인을 위한 일에 적극 나선 것도 생활이 안정된 뒤의 일이었다. 최근 동화 한권의 인세 전액을 기부키로 한 것도 이런 일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도 그의 정체성은 글을 쓰는 것, 지금까지 쓴 160여권의 책이 300여만부 팔린 그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살아 있는 동안 500권의 책을 쓰고, 제 책이 100개 언어로 번역되는 게 목표입니다. 장애를 소재로 쓴 소설로 노벨문학상도 타고 싶습니다.”

고씨에 따르면 장애는 인종과 이념, 계층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장애를 다룬 그의 동화가 이미 20개 언어로 번역된 것이 그 증거다. 그런 만큼 그는 스스로 노벨상을 받는 것도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책이 많이 읽히거나 노벨상을 받는 것은 표면적인 목표일 뿐 보다 근원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장애인과 장애가 없는 이들이 차별없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고씨는 “세상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작가가 되려고 했던 초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며 “제 동화를 읽은 아이들이 자랄 즈음 장애인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됐으면 하는 게 가장 큰 꿈”이라고 말했다.

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