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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70년대 청계천 빈민운동 ‘노무라 아저씨’ 방한… 위안부 소녀상 찾아 헌화

70년대 청계천 빈민운동 ‘노무라 아저씨’ 방한… 위안부 소녀상 찾아 헌화

2013-08-07

청계천 주변에 다닥다닥 들어선 판잣집. 지게를 지고 시내를 활보하는 넝마주이. 한겨울 굴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일가족. 마을에 하나뿐인 공중변소….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푸르메재단 푸르메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는 한국인에게도 이제 낯선 풍경이 된 과거 서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여러 장 공개됐다. 모두 1970년대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빈민운동을 했던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82)가 직접 찍은 사진이었다.

푸르메재단의 초청을 받고 입국한 노무라는 이 자리에서 “1970년대 청계천은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었지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곳이었다”면서 “나에겐 (인생을 배우는)가장 큰 학교였다”고 밝혔다.

지난 6일 푸르메재단 강당에서 노무라 모토유키가 1970년대 한국  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노무라는 193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대여섯살 때부터 주변의 한국인들이 차별받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대학시절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해 알게 된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평생 한국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1968년 한국YMCA를 통해 청계천 빈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1973년에는 아내와 두 자녀 등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빈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청계천 판자촌의 일상은 비참했다. 넝마주이, 날품팔이로 먹고사는 빈민들은 3일 동안 꼬박 일해야 펌프로 퍼올린 20ℓ의 물을 살 수 있었다. 이 물을 사지 못해 청계천 물을 떠다 지은 밥을 먹으면 반드시 설사를 했다. 공동변소 근처는 항상 오물이 넘쳤고 주민들은 피부병을 달고 살았다.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해 허벅지에 구더기가 들끓던 소녀를 들쳐업고 인근 대학병원으로 뛰어갔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당시 그 소녀는 석달 뒤 사망했다.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집에 있던 아이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노무라는 “연탄가스로 사망한 아이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당시 서울 여의도의 한 대형교회에서는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다”며 “ ‘신은 여의도에만 있는가’라는 절망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노무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에서 희망을 얻었다고 밝혔다. 극빈층 주민들도 남은 음식이 있으면 나눠 먹었으며, 일본인인 그를 ‘노무라 아저씨’라 부르며 다정하게 대했다. 아이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함께 활동하던 고 제정구 의원에 대해서는 “항상 한국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 낙관하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1973년 서울 청계천 일대 청계천을 끼고 허름한 판잣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1973년 서울의 모습.|노무라 모토유키 촬영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생활하던 노무라는 1978년 청계천 판자촌이 완전히 철거되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남산 스파이’라 불리며 청계천 일대에 상주하던 안전기획부 직원들에게 오랫동안 감시를 당해 몸도 마음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틈틈이 찍은 사진 2만여장을 가져간 노무라는 600장을 선정해 2006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노무라는 여전히 한국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강연에 앞서 일본대사관 건너편 위안부 소녀상에 헌화했으며, 강연 다음날에는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분향소에 들러 참배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청계천 철거민, 쌍용차 사태에 공통점이 있다. 국가가 구성원 중 가장 약한 상대를 대상으로 폭력을 저지른다는 점”이라며 “고도성장에도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