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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울&]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 기적이야. 첫 번째 기적!”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 기적이야. 첫 번째 기적!”
[사람&] 28일 개원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이일영 초대 원장

2016-04-15

4월28일 정식 개원하는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이일영 초대 원장이 장애 어린이에 대한 조기 통합 치료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넉넉한 웃음을 머금은 흰머리 할아버지가 손을 내민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자리한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이일영(71) 초대 원장.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생활한복 차림이다. 애초 머릿속에 넣어 둔 첫 질문과는 180도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왜 가운을 입지 않고 계세요?”

“재활의학 의사를 하면서 가운을 입지 않았어. 미국 병원에서 일한 20년 동안 그랬어. 어린이 환자를 담당할 경우
특히나. 아이들은 흰색 가운에 공포심이 있잖아. 하지만 한국 병원에선 무조건 가운을 입으라고 해.”

‘의사가운’이라는 선입견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어지는 설명. “어린이 재활은 무엇보다 아이 자신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해. 최대한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재활의 동기를 갖게 하는 것이 치료의 절반 이상이야. 의료진은 그 다음에
가이드를 하는 역할이지.”

이 원장은 손꼽히는 우리나라 재활의학 1세대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1978~1994년 국립 웨스트록스베리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의사로 일했다. 1994년 귀국한 뒤로는 2009년 정년 때까지 아주대 의대 재활의학과 교수로 일했고, 대한재활의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원장으로 있는 어린이 재활병원은 4월 28일 정식 개원한다. 연면적 1만8500여㎡(5560평)에 지상 7층, 지하 3층, 입원 병상 91개 규모다. 하루 500명, 연간 15만 명의 장애 어린이와 지역 주민을 치료할 계획이다. 재활의학과를 비롯한 정신건강의학과·치과·소아청소년과 등 4개 진료과 외에도 신체 영역 치료실(물리, 작업, 언어, 감각통합, 음악치료 등), ABA 조기집중 치료실(응용행동 분석에 기반을 둔 자폐스펙트럼장애 치료) 등을 갖췄다. 장애 어린이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직업교육도 한다. 한마디로 국내 유일의 통합형 어린이 재활전문병원인 셈이다. 지하 수영장을 비롯해 어린이도서관·카페·다목적홀 등 주민 복지시설도 두루 갖췄다.

병원은 2008년부터 순천 등 전국 곳곳에서 문을 연 ‘기적의 도서관’과 여러모로 닮았다. 어린이 전문시설이라는 점이 그렇고, 시민과 기업, 지방자치단체가 힘을 모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병원을 위해 마포구는 1천 평 규모의 부지를 흔쾌히 제공했고, 서울시는 건축비 일부와 의료 장비를 지원했다. 보건복지부도 기자재 일부를 댔다. 병원을 운영하는 푸르메재단이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2011년 시작한 캠페인에는 소설가 고 박완서 씨를 비롯해 이해인 수녀, 정호승 시인, 가수 션, 축구선수 이근호 등 참여자가 1만 명이 넘는다. 넥슨컴퍼니가 병원 건축 예산 440억원 가운데 200억원을 내놓는 등 500여 개 기업·단체들도 기부했다. 이 정도라면 ‘기적의 병원’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맞아. 이건 기적이야. 첫 번째 기적.”

이 원장은 병원 준공을 스스로도 뿌듯해했다. 그는 2008년 병원 건립 추진위원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이 일에 매달렸다.

“우리나라의 성인 재활치료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는데, 어린이의 경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야. 돈이 되지 않으니까. 수가가 낮은 데다, 어른에 견줘 1 대 1 치료에 워낙 에너지가 필요하니 누가 하겠어. 치료가 필요한 어린이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도 정확치 않아.”

장애 어린이가 커 가면서 언어·행동·인지 능력 등 여러 영역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조금씩 목표를 높이는 ‘통합형 치료’가 절실한데도 아이와 부모가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아야 하는 상황도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한다. 그가 병원 건립에 ‘첫 번째 기적’이란 단서를 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병원의 하드웨어는 국제적 수준이야. 문제는 프로그램이지. 발달장애 아이들이 조기에 집중적으로 통합 치료를 받으면 그 성과는 놀라워. 좋은 프로그램, 달리 말해 좋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해. 그건 정부가 갖춰 주고 지원해 줘야지. 시민들에게 또 손을 벌릴 수는 없잖아.” 이 원장은 100원짜리, 1천원짜리, 1만원짜리, 10만원짜리, 100만원짜리 프로그램이 모두 가능하다고 비유하면서, 100원이나 1천원짜리 치료에 머물러야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가 바라는 ‘두 번째 기적’이다.

그리고 욕심을 내는 마지막 ‘세 번째 기적’. 이 원장은 이런 통합형 어린이 재활전문병원이 전국으로 퍼져 가기를 꿈꾼다고 했다. “상암동 병원이 롤모델이 돼 전국 여러 도시에 비슷한 어린이병원이 생겨야 해. 국민 모두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린이 재활치료만큼은 나라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만 이 원장은 세 번째 기적에까지 온힘을 쏟을 수 없는 처지다. 그는 4월 28일 정식 개원에 맞춰 원장직에서 물러난다. “병원 운영을 책임지려면 풀타임으로 일해도 부족해. 하지만 난 다른 할 일이 있어서 전념하기 어렵네. 대신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예비군은 할 거야.”

그는 몇 해 전부터 맡아 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의 공동대표로서 북한 의료 개선 활동에 더 신경을 쓸 계획이다.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를 지원하는 국제 엔지오 사업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후임은 임윤명 전 경인의료재활센터병원장이 맡는다.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을 찍기 위해, 병원 로비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걸린 대형 그림 앞에서 자세를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사석원 화백이 호랑이, 토끼, 학 등의 동물을 재밌게 그려 기증한 작품이다. 이 원장은 이내 인자하고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 표정이 그림 속의 웃는 호랑이와 많이 닮았다.

정재권 <서울&> 선임기자 jjk@hani.co.kr

출처 : http://www.seouland.com/arti/society/society_general/2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