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불행 겪고 타인 고통 알았죠"…집념이 세운 어린이 재활병원

"불행 겪고 타인 고통 알았죠"…집념이 세운 어린이 재활병원

2016-04-19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기자→맥주회사 대표→공익재단 이사 변신
"재활병원, 이젠 정부가 도울 때…'투명한 운영' 감시도 필요"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불행이라는 건 남의 문제였어요. 나는 글 쓰는 기자였고,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사고에서 고통당한 사람들은 기사 속 숫자로만 있었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불행이 다가오니 그제야 나에게도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내는 100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연수차 갔던 2년 독일생활 막바지 가족여행 중 영국의 한 도로에 차를 잠깐 세우고 내린 사이 뒤차가 덮친 사고의 결과였다.

뒤차 운전자는 편두통으로 두통약을 서너 알 복용했다고 했다.

아내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왼 다리 절단 수술을 세 차례나 받고 나서였다. 그나마 영국의 병원 의료진의 헌신적인 진료 덕분이었다.

의사는 매일 아침 아내의 상태를 설명했다. "위독하단 걸 알겠으니 다른 환자를 돌보라"고 떠밀어도 의사는 "당신 아내가 가장 위독하니 당신은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1998년 6월 경험한 '인간의 얼굴을 한 의료진'의 이야기이다.

귀국 후 겪은 한국의 병원은 딴판이었다. 급히 치료받아야 하는 아내를 보고도 병원은 입원을 시켜주지 않았다. 예약 대기자가 많다는 이유였다. 며칠을 기다려서야 가장 비싼 1인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내 첫 어린이재활병원인 서울 상암동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개원을 앞두고 19일 이 병원에서 만난 백 이사는 위독한 아내와 함께 유럽과 한국의 병원을 차례로 다닌 경험 때문에 재활병원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28일 개원을 앞둔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연합뉴스DB]

남은 인생을 장애인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백 이사는 '인간의 얼굴을 한 병원'을 만들려면 우선 재단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맥주양조학을 전공하고 자신만의 맥주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후배 방호권씨를 떠올렸다. 의기투합해 2002년 맥주 회사 '옥토버훼스트'를 차렸다.

회사가 궤도에 오르자 백 이사는 지분 10%와 아내가 받은 보험금의 절반인 10억원으로 2005년 푸르메재단을 설립했다. 2년 뒤에는 치과 병원을 개원했다.

백 이사는 "처음에는 1만평 이상 큰 병원을 세우려는 욕심 때문에 3천평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한 지자체장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이가 아픈데 치과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한 중증장애인의 호소에 우선 치과를 세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장경수 당시 서울대 치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신교동에 '푸르메 나눔치과'를 열었다.

치과가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기부가 답지했다. 일부 장애인들은 땅을 내놓기도 했다.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은 이렇게 장애인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포함한 개인 기부자의 돈이 모여 세워졌다.

주변에 기부를 권했을 때 '네게 술은 사겠지만, 기부는 하고 싶지 않다'는 답변을 듣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백 이사는 "풀뿌리 시민의 돈을 모아 병원을 연 것은 한국 사회가 성숙했다는 증거"라고 진단했다.

28일 정식 개원하는 병원은 총 91개 병상, 외래 병상 20개로 시작한다.

그러나 개원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매년 30억∼37억원의 운영적자가 예상된다. 적자가 메워지지 않으면 운영을 지속하기 어렵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푸르메재단 제공]

그는 "민간이 병원을 세웠으니 이제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공공 성격의 병원인 만큼 정부 지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대신 투명하게 운영하는지 감시는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그는 민간이 운영하고 정부가 지원·감시하는 방식을 공공병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백 이사는 "우리 병원에는 대형병원에서 연봉 깎여가며 온 사람도 많을 정도로 사명감이 있는 의료진이 많다"며 "이를 시작으로 장애인 재활을 넘어 스스로 살 수 있는 직업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활 단계까지 지원하고 싶다"고 포부를 말했다.

comma@yna.co.kr

출처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4/18/0200000000AKR20160418127500004.HTML?input=1179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