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지선과 션이 그만 달려도 되는 나라

[이정모 칼럼] 이지선과 션이 그만 달려도 되는 나라

2017-04-04

“너무 감정이입 하지 마세요.” 여인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말이다. 다짐했다.

절대로 눈물 따위는 글썽이지 않겠노라고. 지금까지 신문과 방송에서 그리고 책으로 무수히 들은 이야기이니 담담히 듣고 여인의 이야기가 끝나면 격려해주겠노라고 말이다.

여인은 아주 명랑했다. 스물한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고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잃은 이야기, 더 이상 가져다 쓸 피부 조직이 없을 정도로 피부 이식수술을 받은 이야기, 피부와 혈관, 근육 조직까지 함께 이식하는 목 수술을 받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었던 이야기를 그리도 담담히 풀어냈다. 여인이 웃을 때마다 같이 웃어줬다. 하지만 입은 억지로 웃어도 눈이 촉촉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여인이 그 몸으로 미국으로 유학 가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한동대 교수가 되었다는 이후의 이야기는 오히려 평범하게 들렸다. 그렇다. 여인은 『지선아 사랑해』의 주인공 이지선씨다.

정작 놀란 일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마라토너다. 그것도 국제마라톤 대회에서 두 차례나 풀코스를 달린 마라토너다.

2009년 11월 1일 오전 10시 30분, 뉴욕시티마라톤대회 출발선에 선 이지선씨는 말했다. “걸어서라도 결승선에 돌아오겠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격려했다. 하지만 비장애인이 그냥 걷기만 해도 힘든 42.195㎞를 그녀가 끝까지 완주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출발점에서 멋진 사진을 찍으면 족했다. 하지만 스태튼 아일랜드를 떠난 지 7시간 22분 만에 이지선 씨는 맨해튼의 결승점을 통과했다. 생애 첫 마라톤 도전에 완주한 것이다.

그녀는 마라톤을 한 번으로 끝내지 못했다. 이듬해인 2010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이번에는 6시간 45분 만에 완주했다. 기록만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녀의 이식한 피부에서는 땀이 나지 않는다. 체온조절이 어렵다. 그녀는 수없이 그만두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서 그만둬야 할지 몰라서 계속 달렸다”는 그녀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아무도 달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 달리라고 격려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달렸다. 왜 그녀는 달렸을까?

션은 가수다. 많은 사람들이 지누션의 노래 ‘말해줘’를 사랑한다. 하지만 가수의 입장에서는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사람들이 정작 그를 정말로 사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람들은 그의 화목한 가정과 선행을 좋아한다. 그는 흔히 ‘기부천사’로 불린다. 세상에 천사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그가 마라토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그가 4,219만 5,000원을 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약간의 센스만 있다면 ‘아, 가수 션이 마라톤을 했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션은 지난 3월 19일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42.195㎞를 달리면서 m당 1,000원을 기부한 것이다.

언뜻 사진으로 봐도 션의 몸매는 완벽하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다. 하지만 마라톤 완주는 처음이라고 한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고통에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을 것이다. 완주하는 대신 하프 마라톤이라고 생각하고 m당 1,000원이 아니라 2,000원을 기부해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달렸다. 왜 그랬을까?

왼손이 하는 선행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다. 이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선행을 할 때 통하는 말이다. 옳은 일이지만 혼자서 할 수 없을 때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뿐만 아니라 사해동포에게 다 알려야 한다.

이지선 씨가 달리고 션이 달리는 이유는 한 가지다. 아픈 아이들을 고치기 위해서다. 우리 사회에는 재활과 사회복귀를 위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 30만 명의 아이들이 있다. 이들을 위한 어린이 재활병원은 놀랍게도 딱 한 군데. 일주일 전인 3월 29일 개원 1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 바로 그곳이다. 두 사람은 푸르메재단의 홍보대사다.

어린이재활병원에서는 작년에 3만 6,000명이 진료를 받았다. 환자의 40%는 수도권 밖의 지방에서 왔다. 이들의 재활치료를 위해 가족이 서울의 병원 근처로 이사를 오기도 한다. 어린이재활병원은 나라가 지어서 운영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없다. 이것뿐이다. 지금 입원하려고 기다리는 아이가 780명. 그들이 입원하려면 평균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어린이재활병원은 1만 명의 시민과 500여 기업, 마포구와 서울시가 힘을 모아 지었다. 그런데 작년에 30억 원 정도의 적자가 났다고 한다. 올해도 비슷한 적자가 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시가 돕고 있다. 이젠 중앙정부도 나서야 한다. 아마 법적 근거와 전례가 없다는 핑계를 댈 것이다. 그렇다면 법과 전례를 만들어야 한다. 설마 그게 션과 이지선 씨가 달리는 것보다야 어렵겠는가. 두 분에게 “이젠 그만 달리셔도 돼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제대로 된 나라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