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캐나다에서 찾은 미래의 길

장애인 복지, 캐나다에서 길을 찾다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 조사단은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장애인 복지 선진국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세계 유일의 장애인 적금(RDSP) 제도, 돌봄 제공자와 집을 공유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홈셰어 제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통합형 임대주택 ‘코러스 아파트’ 등을 살펴보며 진정한 장애인 복지 선진국으로 나아갈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 가족의 삶은 어떠할까요? 발달장애 자녀를 둔 아버지이자, 한인 장애인 가정을 위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히어 앤 나우'를 이끌고 있는 이보상 사무총장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칼럼]
내가 너의 곁을 떠날지라도
캐나다에서 찾은 미래의 길


캐나다 BC주=이보상 히어 앤 나우 사무총장


나는 발달장애 자녀를 둔 아빠로서 캐나다로 이민 온 사람이다. 돌아보면 이민의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우리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러나 이민을 왔다고 해서 모든 걱정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자폐 진단을 받았던 순간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 ‘내가 죽고 나면, 우리 아이는 누가 돌보나?’ 장애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그러나 누구도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가장 절실한 질문이다.



이보상 '히어 앤 나우' 사무총장


내 인생을 바꾼 기관, PLAN


1990년대 한국은 지금보다 발달장애에 대한 정보가 적고, 정부 지원도 제한적이었다.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혼자 고민한다고 길이 생기지 않는다.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이자.’ 그렇게 같은 교회・학교의 아빠 몇 명이 모여 사랑방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같은 나라들의 사례를 찾아보았고, 외국의 부모 단체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 조언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2008년 브솔복지재단을 만들며 ‘부모 사후 장애 자녀의 미래’라는 질문에 작은 답을 만들어보고자 노력했다. 그 후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지만, 마음속 질문은 그대로였다. 아니, 더 강렬해졌다.


아이가 10학년이던 시기에 나는 곧 성인이 될 아이의 미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내가 가진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때 캐나다의 PLAN(Planned Lifetime Advocacy Network)을 만났다. 이 곳은 놀랍게도 바로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우리가 더 이상 자녀를 돌볼 수 없을 때, 누가 우리 아이를 돌봐줄 것인가?’


PLAN의 활동 모습. PLAN은 커뮤니티 커넥터(Community Connector)를 통해 장애인과 협력하여 개인별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진 출처: PLAN 홈페이지(plan.ca)PLAN의 활동 모습. PLAN은 커뮤니티 커넥터(Community Connector)를 통해 장애인과 협력하여 개인별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진 출처: PLAN 홈페이지(plan.ca)


PLAN은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기관이 아니다. 이들의 슬로건은 ‘장애 자녀의 행복한 삶과 가족의 마음의 평화’. 핵심 업무는 장애 자녀의 미래 설계와 관계 형성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PLAN은 행복한 삶의 요소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1) 자녀를 사랑하고 돌봐줄 관계
2) 자녀가 세상에 기여할 기회
3) 자녀가 편안히 지낼 집
4) 자녀의 선택 존중
5) 자녀가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재정


이 가운데 핵심은 바로 ‘관계’다. 돈도, 법도, 제도도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장애 자녀를 둘러싼 관계는 한두 사람이 아니라 작은 공동체 형태여야 한다. PLAN은 이를 ‘Personal Network(개인 관계망)’라고 불렀다. 한 사람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여러 사람이 느슨하지만 꾸준하게, 아이의 삶 곁에 머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 네트워크는 부모의 친구일 수도, 교회의 지인일 수도, 주간 활동에서 만난 사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떠난 뒤에도 이 관계가 계속 유지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PLAN과의 만남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캐나다 밴쿠버의 한인 장애가정들과 함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민자 가정은 가족도 친척도 멀리 있고, 이웃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기도 어렵다. 외롭고 단절된 환경에서 장애 자녀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더 절박하다. 그래서 관계를 만들어주는 기관이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히어 앤 나우(Here&Now)’를 설립한 이유다. 우리는 한인 장애 가정들이 더 이상 혼자 고립되지 않도록, 아이 주변에 사람과 관계가 남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히어 앤 나우’ 사무실(위)과 이곳에서 열린 한인 장애인 가족 행사 모습(아래). ‘히어 앤 나우’는 캐나다 한인 장애인 가족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래 설계 및 주간 활동 프로그램, 주거 지원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히어 앤 나우’ 사무실(위)과 이곳에서 열린 한인 장애인 가족 행사 모습(아래).
‘히어 앤 나우’는 캐나다 한인 장애인 가족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래 설계 및 주간 활동 프로그램, 주거 지원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부모 사후, 누가 내 아이를 돌보나?’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첫 단추


우리는 미래 설계를 시작할 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원하는 자녀의 가장 멋진 일주일을 그려 보라.”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핵심을 찌른다. 그 일주일 안에 자녀의 미래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1) 주중에는 데이 프로그램, 봉사, 취미활동 또는 일터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2) 퇴근 후나 주말에는 함께 지낼 가족, 홈쉐어 제공자, 친구들과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일 년 중 일정 기간은 휴가를 간다.
3) 집은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4) 재정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어야 한다.
5) 무엇보다 아이의 선택이 존중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과 살고 싶은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싶은지, 어떤 활동을 할지 등 일상의 모든 요소를 아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미래 설계의 핵심이 된다.


아이의 ‘도움 필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준비 전략


발달장애는 스펙트럼이다. 필요한 지원의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미래 계획을 세울 때는 아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정도를 상·중·하로 구분해 보면 좋다. 그리고 행복한 삶의 5가지 요소(관계·집·기여·선택·재정)를 각 상황에서 어떻게 충족할지 살펴본다.


그룹홈에서 거주하는 캐나다 고령 장애인 모습그룹홈에서 거주하는 캐나다 고령 장애인 모습


1) 도움의 필요 정도 ‘상’: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경우
이 경우 부모 사후 가장 큰 위험은 관계가 끊겨 고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 관계망(Personal Network)이 필요하다. 즉, 부모 대신 챙겨줄 사람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다. 형제자매가 없고 이웃이나 친척도 많지 않다면, ‘히어 앤 나우’처럼 도움 줄 기관이 필요하다.
집은 아마도 그룹홈이 될 것이다. 그룹홈에서는 주중 활동, 식사, 위생, 안전, 건강관리 등 일상 전반을 지원해 준다. 이에 필요한 재정은 대부분 정부에서 지원된다. 추가적으로 자녀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PWD(Persons with Disability Benefit, 18세 이상 장애인에게 캐나다 BC주 정부가 지급하는 수당), RDSP(Registered Disability Savings Plan, 캐나다의 등록장애인저축계좌) 등을 활용해 마련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 법적으로 대리권 동의, 후견인 지정(committee), 신탁 등을 준비해 둔다.


2) 도움의 필요 정도 ‘중’: 그룹홈 거주 대상은 아니지만 혼자 살기는 어려운 경우
이 경우 가장 현실적인 주거 형태는 홈쉐어(Home Share), 또는 리브 인 서포트(Live-in Support)다. 전자는 장애인이 다른 가정에서 거주하는 형태이며, 후자는 장애인의 집에 서포터(지원인)가 들어와 함께 거주하는 방식이다. 특히 리브 인 서포트의 경우, 서포터가 바뀌어도 장애인은 계속 같은 집에 거주하기에 정서적 기반이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다.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홈쉐어 프로바이더(집 제공자)가 주 관계인이 된다. 그리고 개인 관계망도 필요하다. 주간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친구나 서포터 등을 중심으로 관계 형성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친구들과 관계 형성이 가능하다면 또래들과 그룹 네트워크을 만들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자녀의 상황에 따라 에이전시에서 제공하는 고용 지원 서비스를 통해 일을 할 수도 있다. 재정은 거주하는 집의 상황(임대 또는 모기지 등)에 따라 달라지지만, PWD와 RDSP로 준비할 수 있고, 여기에 부모의 유산을 신탁으로 설계하면 된다.


3) 도움의 필요 정도 ‘하’: 일정 부분 독립 가능한 경우
집은 친구와 함께 살 수도 있고, 적절한 지원만 있다면 혼자 살 수도 있다. 이 경우도 정부가 지원하는 홈쉐어 혹은 리브 인 서포트를 이용할 수 있다. 관계는 형제자매, 개인 관계망(Personal Network), 교회나 동호회, 그룹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다. 기여 측면에서는 고용 가능성이 가장 높으므로 잡 코칭(Job Coaching)이나 고용 지원 프로그램을 활용한다. 재정은 PWD와 RDSP에 일자리 수입이 더해지고, 거기에 부모 유산을 신탁(Trust)으로 구성하면 보다 탄탄하게 설계할 수 있다.


그룹홈에서 거주하는 캐나다 고령 장애인 모습‘히어 앤 나우’를 통해 홈셰어를 이용하는 최선우(가명) 씨.
오른쪽 사진은 홈셰어 가정에서 선우 씨가 생활하는 방 모습이다.


많은 부모가 ‘우리가 죽고 나면 어떻게든 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부모 사후에 갑자기 없던 관계가 형성되거나 재정 구조가 빠르게 만들어지거나 집이 구해지는 일은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부모가 여유 있을 때, 몸이 건강할 때, 마음이 아직 단단할 때 미리 하나씩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준비는 돈이 많아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특히 캐나다 BC주는 장애인을 위한 복지제도가 탄탄하기 때문에 큰 비용 없이도 충분히 자녀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장애 자녀를 키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두려움과 슬픔, 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완벽한 미래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쌓이는 일상의 행복이다. 행복한 하루가 모이면 행복한 삶이 된다. 아이의 장애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부모의 삶과 아이의 삶의 무게는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부모 욕심도, 비교도, 조급함도 내려놓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씩만 하면 된다. 자녀의 장애를 공개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걸어가다 보면, 내가 곁을 떠나는 날이 와도 우리 아이는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 속에서, 관계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오늘보다 조금 더 편안한 내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진=푸르메재단, 이보상 총장, 플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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