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의 힘으로 1만1,000명 자폐인 지원하는 오티즘 BC
<장애인 복지, 캐나다에서 길을 찾다>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어떻게 가능할까.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그 실마리를 찾아 장애인 복지 선진국 캐나다로 떠났다. 장애인의 노후를 위해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세계 유일의 장애인 적금(RDSP) 제도, 돌봄 제공자와 집을 공유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홈쉐어 제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통합형 임대주택 ‘코러스 아파트’ 등 캐나다의 복지 현장을 살펴보고, 진정한 장애인 복지 선진국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5편>
자폐, 고쳐야 할 ‘결함’ 아닌 ‘다름’으로 긍정해야…
당사자의 힘으로 1만1,000명 자폐인 지원하는 오티즘 BC
향긋한 파이 굽는 냄새가 가득한 밴쿠버의 어느 작은 가게. ‘가비와 줄스(Gabi & Jules)’라는 이름의 가게에서 푸르메재단 조사단은 오티즘(Autism) BC의 전무이사 수잔 페로(Suzanne Perreault)와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셀리나 림(Selina Lim)을 만났다. 오티즘 BC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州)에 거주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다. 1975년 시작돼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이들은 왜 사무실이 아닌, 작은 파이 가게를 만남의 장소로 정했을까? 이곳은 단순히 맛있는 파이를 파는 곳이 아니었다. 자폐 자녀를 둔 어머니가 운영하며, 오티즘 BC의 지원을 통해 희망을 찾은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가게 직원의 35%도 장애인이다.

자폐 자녀를 둔 어머니가 운영하는 파이 가게 ‘가비와 줄스(Gabi & Jules)’에서
오티즘 BC에 대해 설명하는 수잔 페로(Suzanne Perreault・사진 가운데) 전무이사.
장애 당사자인 직원들의 경험이 다른 장애인 돕는 원동력
“우리의 역할은 부모들이 자녀를 ‘고쳐서’ 사회에 맞추도록 돕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부끄러움을 경험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죠.”
오티즘 BC가 하는 일에 대해 묻자, 페로 이사는 이같이 답했다. 이 답변에 오티즘BC의 운영 철학이 담겼다. 이들의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신경다양성 긍정(Neuro-affirmative)’. 자폐를 치료해야 할 질병이나 의료적 결함으로 보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오티즘 BC는 단 13명의 직원으로 11,000명이 넘는 회원을 지원하고 있다. 더구나 직원의 98%가 자폐 당사자이거나 장애가 있는 가족의 보호자이거나, 혹은 비가시적(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이는 의도적인 채용 정책이 아니라, 신경다양성을 존중하는 기관의 철학이 만들어낸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했다. 페로 이사는 “누군가에게는 약점이나 결핍으로 보일지 모를 이들의 ‘살아있는 경험(Lived Experience)’이 오티즘 BC를 자폐 장애인들이 두려움 없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상상해 보자. 자녀의 자폐 진단을 받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진 부모가 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저도 자폐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얼마나 힘드신지 알아요.” 또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성인 자폐인이 상담을 요청했을 때, “저도 자폐인이라 그 마음을 잘 알아요. 우리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뿐이에요”라는 따뜻한 위로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그 순간 ‘복지’는 일방적인 시혜나 지원이 아니라 깊은 공감과 따뜻한 연결이 된다.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은 오티즘 BC는 자폐 당사자 등으로 구성된 13명의 직원이 11,000명의 회원을 지원한다.
오티즘 BC는 전 직원이 원격으로 근무하는 ‘완전한 원격근무(fully remote)’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정해진 사무실도 없다. 페로 이사는 “이 같은 운영 방식은 신경다양성을 가진 직원들이 자신의 컨디션에 맞춰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했다. 많은 자폐인이 대면 소통 과정에서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점에서 지원받는 자폐 당사자와 직원 모두를 배려한 것이다. 또한 자녀 양육 부담이 큰 직원들의 번아웃을 예방하는 효과적인 복지 제도이기도 하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보 허브’다. 4명의 지역 코디네이터는 한 달에 200건이 넘는 정보 요청을 처리하며, 갓 진단을 받은 가족에게 필요한 지원 기관을 연결해 주고, 부모가 학교 등에서 자녀의 권리를 스스로 옹호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정 치료법을 강요하는 대신, 가족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정을 지지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이들의 철칙이다. ‘마인크래프트’ 온라인 클럽부터 각자 다른 음악을 들으며 함께 춤추는 ‘사일런트 댄스 파티’까지, 고립되기 쉬운 당사자들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해준다.
오티즘 BC는 사회에서 고립되기 쉬운 자폐 당사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해 준다.
사진은 6~16세 아동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포켓몬클럽 모습.
자폐에 대한 낡은 관념 없애고자 노력
오티즘BC는 상징적인 옹호 활동으로 세상에 말을 건다. 이들은 오랫동안 자폐의 상징으로 쓰여온 파란색과 퍼즐 조각 사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파란색은 자폐를 병리화하고 치료(cure)의 대상으로 보는 해로운 이미지를 강조하고, 퍼즐 조각은 당사자를 ‘전체 그림에 맞춰야 할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자폐인 커뮤니티가 온라인 투표를 통해 스스로 선택한 빨간색(Red)과 황금색(Gold)을 새로운 상징으로 내걸었다. 바로 ‘레드 인스테드(Red Instead)’ 캠페인이다. 자폐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 힘으로 세상의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방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2025년 4월 기관 설립 50주년을 맞아,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주요 랜드마크를 빨간색과 금색으로 물들이며 ‘자폐에 대한 낡은 관념을 버리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티즘 BC는 지난 4월 ‘레드 인스테드(Red Instead)’ 캠페인을 벌이며,
캐나다 밴쿠버 사이언스 월드 건물에 빨간색과 금색 조명을 밝혔다.
우리에게도 ‘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도전 필요
한국의 장애인 복지는 여전히 ‘장애인 등록증’이라는 단단한 벽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캐나다는 정신장애, 알코올 중독까지 포함해 15세 이상 국민의 25%를 장애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파악한다. 장애를 정의하는 관점부터 다른 것이다. 오티즘 BC를 만나며 우리의 복지 시스템에 대해 두 가지 문제점을 떠올렸다. 첫째는 우리는 언제까지 장애를 ‘극복’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볼 것인가, 둘째는 장애인 등록 기준에 들지 못해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수많은 ‘경계선 위의 사람들’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사회적 공감대도, 법적 기반도 아직은 막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장애 자녀를 둔 부모가 더는 ‘부족한 부모’라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당사자들이 ‘고쳐져야 할 존재’가 아닌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시민’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이제는 우리도 낯선 대안을 마주해야 한다. 자폐를 문제가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고, ‘고치기’ 위한 지원이 아닌, 당사자의 ‘다양한 삶을 지지’하는 지원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글=김정훈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고용지원팀장
사진=푸르메재단, 오티즘BC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