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집과 지역사회 속 삶을 제공하는 생활공동체
<장애인 복지, 캐나다에서 길을 찾다>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어떻게 가능할까.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그 실마리를 찾아 장애인 복지 선진국 캐나다로 떠났다. 장애인의 노후를 위해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세계 유일의 장애인 적금(RDSP) 제도, 돌봄 제공자와 집을 공유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홈쉐어 제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통합형 임대주택 ‘코러스 아파트’ 등 캐나다의 복지 현장을 살펴보고, 진정한 장애인 복지 선진국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4편>
안전한 집과 지역사회 속 삶을 제공하는 생활공동체
라르시 그레이터 밴쿠버
푸르메재단 연수단에 라르시 밴쿠버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입주민 콘라드 씨(왼쪽 두 번째)
“어서오세요,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에요. 이웃집 주변을 정리하고, 도와주고 왔어요! 나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사진도 얼마든지 찍어도 좋아요(웃음).”
라르시 그레이터 밴쿠버(L’Arche Greater Vancouver)에서 거주하는 콘라드(Conrad) 씨는 환한 웃음과 목소리로 푸르메재단 연수단에게 인사를 건넸다. 주변에 앉은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연수단에게 라르시에서 사는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캐나다 밴쿠버에는 장애인이 점차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도 마음 편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 바로 ‘라르시(L’Arche)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캐나다 신학자이자 토론토 성 마이클대학(St. Michael’s College)의 철학교수였던 장 바니에(Jean Vanier)가 1964년 두 명의 지적장애인과 함께 북프랑스의 한 농가에서 살면서 시작됐다. ‘라르시(L’Arche)’는 프랑스어로 ‘방주(the Ark)’를 뜻하는데, 그 이름처럼 현재까지 다양한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라르시 밴쿠버는 국제라르시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rche)의 일원으로 1974년에 세워졌으며, 캐나다 전역에는 31개의 라르시 공동체가 운영 중이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로망으로 자리 잡은 생활공동체
라르시 밴쿠버 외관
BC주 버나비(Burnaby) 시에 새로 지은 라르시 밴쿠버 건물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3개의 그룹홈과 10개의 독립적 생활공간, 주민(비장애인)을 위한 29개의 임대(공동)주택으로 구성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환경을 조성했다. 생활을 공유(Shared Life)하는 공동체라는 특성에 따라 개인 공간(침실 등)은 다소 좁은 듯했지만, 대신 거주민들이 잘 어울릴 수 있도록 공동 주방과 거실, 옥상 편의시설, 회의실, 도서관, 예배실 등의 공용 공간이 넓게 마련돼 있다.
라르시 구성원은 발달장애가 있는 핵심 멤버(Core Member)와 어시스턴트 멤버(Assistants Member)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식사 준비, 설거지, 청소, 쇼핑, 산책 같은 가사 활동부터 일상생활 전반을 함께한다. 어시스턴트는 핵심 멤버와 함께 생활하며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데, 단순한 ‘돌봄 제공자’를 넘어 인간적인 상호관계를 맺으며 공동체 생활의 동반자 역할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라르시에서 저녁 식사는 특히 중요한 시간으로,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
주말에는 마을로 나가 볼링, 영화, 콘서트처럼 좋아하는 활동을 즐기기도 한다. 생일이나 명절과 같은 특별한 날은 공동체 전체가 함께 축하하는 중요한 행사로 여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라르시 구성원이 여름휴가를 함께 계획하고 떠나는 일이었는데, 이러한 이벤트는 구성원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장애인 입주민이 살고 있는 독립적 생활 공간
라르시 밴쿠버의 전무 이사인 페이페이 펭(FeiFei Peng) 씨는 “다양한 문화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라고 이곳을 설명했다. 무엇보다 장애가 있는 핵심 멤버 역시 단순한 보살핌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나누고 기여하는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라르시 밴쿠버의 사장이자 라르시 밴쿠버 재단 회장인 짐 래티머(Jim Lattimer) 씨는 “우리가 얼마나 다르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소중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고유한 재능을 가졌다”고 말했다.
라르시는 발달장애 자녀를 둔 이 지역 부모에게는 ‘로망’과 같다. 펭 씨는 “얼마 전 지역 내 한인 부모들이 방문해 라르시를 둘러봤다”며 “그들은 ‘(이곳이) 부모가 없더라도 장애 자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자신들의 사후(死後)에 자녀 의 삶을 걱정하는 부모 눈에는 더없이 간절한 ‘희망의 공간’인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사회에도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지원이 담보될 수 있는 장애인 주거 공동체가 얼마나 절실한지 느껴졌다.
라르시 밴쿠버에서 생활하는 고령 발달장애인 모습
장애인을 위한 안전한 집과 지역공동체로 향하는 길
장애인이 안전한 ‘내 집’을 일구고 지역사회 안에서 이웃과 일상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회.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 중 가장 큰 산은 지역사회 이웃과의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교류이다. 라르시 밴쿠버는 통합(소셜믹스) 주택을 건립하면서 선구적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비장애인 입주민에게 임대료가 낮은 주택을 제공하면서 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통합을 유도했음에도 입주민 간의 교류가 기대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곳이 장애인 구성원을 위한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관 ‘라르시 그레이터 밴쿠버’와 건물 자산을 관리하는 ‘라르시 밴쿠버 재단’의 형태로 분리되어 운영된다는 점도 그 한 이유가 됐다. 신축 건물을 건립하면서 들어간 큰 비용과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이로 인해 장애인 가구와 비장애인 가구가 한 건물 안에서 분리・관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라르시 밴쿠버는 공동 식사, 생일 등 기념일 축하 행사, 지역 내 봉사활동 등을 기획하며 장애인 입주민이 지역사회・이웃과 잘 교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비자 문제 등 다양한 원인으로 어시스턴트 멤버가 이탈하는 것도 라르시의 고민거리 중 하나다. 공동체 구성원의 잦은 변화는 새로운 문화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한 멤버와 이별하면서 장애인 구성원이 갖는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고민이 깊다.
입주민 공용공간(예배실)에서 라르시 밴쿠버에 대해 소개하는 짐 래티머(Jim Lattimer) 사장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재정적 혜택으로 인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단절과 갈등을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진정한 통합적 주거모델을 추진하려면 단순히 하나의 건물 안에 사람들을 모아두는 것을 넘어, 진정한 공동체성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창의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많은 어려움과 문제를 겪으면서도 장애인에게 안전한 집과 지역사회 속 삶을 지원하고자 노력하는 라르시 밴쿠버의 시도는 장애인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글=서빛나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서비스지원팀장
사진=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