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 장애인 적금, 캐나다 RDSP
<장애인 복지, 캐나다에서 길을 찾다>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어떻게 가능할까.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그 실마리를 찾아 장애인 복지 선진국 캐나다로 떠났다. 장애인의 노후를 위해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세계 유일의 장애인 적금(RDSP) 제도, 돌봄 제공자와 집을 공유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홈쉐어 제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통합형 임대주택 ‘코러스 아파트’ 등 캐나다의 복지 현장을 살펴보고, 진정한 장애인 복지 선진국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3편>
"연간 150만 원 저축 시 정부가 350만 원 지원"
세계 유일 장애인 적금, 캐나다 RDSP
“RDSP(Registered Disability Savings Plan, 등록장애인저축계좌)는 정말 좋은 제도예요. 저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가 혼자 남겨졌을 때를 생각하면 늘 불안한데, RDSP로 마련된 자금으로 최소한의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입니다. 부모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경제적 안전망’인 셈이죠.”
25년 전, 한국에서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판정을 받은 둘째 아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캐나다로 이민 온 유은경(가명) 씨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아이의 RDSP 계좌에 매달 500캐나다달러(약 50만 원)씩 꾸준히 저축하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약 40만 캐나다달러(약 4억 원)를 만들어 집을 마련해줄 계획이다. 유언장과 신탁(Trust)을 설정해 훗날 만약 아들이 혼자가 되더라도 큰돈을 계획적으로 쓸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뒀다.
유씨는 “RDSP는 부모 사후 남겨질 비장애인 큰아들의 부담까지 덜어준다”고 말했다. “첫째에게 (장애를 가진) 동생의 생계까지 책임지게 하는 것은 너무 큰 부담이잖아요. 동생의 RDSP 덕분에 큰 아이도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어 형제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1,500캐나다달러 저축하면 정부가 최대 3,500캐나다달러 매칭 지원
RDSP는 캐나다 연방정부가 2008년 도입한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장애인 적금 제도’다. 장애인 당사자(또는 가족)가 저축한 돈에 정부가 일정 금액을 더해주는 방식이다. 단순한 연금이나 일시적인 수당이 아니라 국가가 장기간 함께 저축하며 장애인의 노후를 뒷받침한다.
30여 년 전 캐나다로 이민 온 황희철 씨 가족은 딸 로즈(맨오른쪽) 씨의 RDSP 계좌를 11년째 유지하고 있다.
RDSP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캐나다 연방정부로부터 ‘장애인세액공제(Disability Tax Credit, DTC)’라는 자격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장애로 인한 어려움이 장기간 지속될 것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차다.
RDSP의 핵심은 파격적인 정부 지원에 있다. 먼저 ‘캐나다 장애인 저축 지원금’을 살펴보자. 이는 가족의 저축액에 정부가 돈을 더 보태주는 ‘매칭 지원금’이다.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 지원된다. 예를 들어, 연간 1,500캐나다달러(약 150만 원)를 저축하면 정부가 최대 3,500캐나다달러(약 350만 원)까지 더해준다. 내가 낸 돈보다 정부가 내주는 돈이 두 배 이상 많다. 이 지원금은 평생 최대 7만 캐나다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또한 RDSP 계좌를 개설하기만 해도 정부는 ‘캐나다 장애인 저축 채권(Canada disability savings bond, CDSB)’을 지원한다. 한 푼도 저축하지 않더라도, 매년 최대 1,000캐나다달러(약 100만 원)의 지원금을 계좌에 넣어준다. 이는 저축할 여력조차 없는 최저소득층 가구를 배려한 방안이다. 이 채권은 평생 최대 2만 캐나다달러(약 2,000만 원)까지 쌓인다. 덕분에 소득이 거의 없는 장애인이라도 20년간 계좌를 유지하기만 하면, 최소 2만 캐나다달러의 자산을 형성할 수 있다.
장애자녀가 10살 전후에 RDSP 계좌로 저축을 시작해 30년간 지속할 경우(본인납부액 최대 20만 캐나다달러), 정부지원금과 저축채권(최대 9만 캐나다달러)이 더해지고 복리로 이자가 붙으면 한화 4억 원 정도로 저축액이 불어난다. 이 돈을 ETF 등에 투자할 수도 있어 더 많은 액수도 기대할 수 있다(소득수준 등을 고려한 향후 자녀의 수령액은 www.rdsp.com의 ‘RDSP 계산기’ 코너에서 예상 가능하다).
중요한 점은 RDSP 계좌에 수만 달러가 쌓여도 장애인이 매달 받는 장애수당이나 다른 연방정부의 복지급여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산을 모으면 오히려 복지 혜택이 줄어드는 ‘복지 함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캐나다 전역에서 약 28만 개의 RDSP 계좌가 개설돼 총 102억 캐나다달러가 넘는 자산이 축적됐다(2023년 기준). 이 중 약 62%가 정부의 지원금과 채권으로 채워졌으니, 국가의 약속이 실제로 많은 가정의 희망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돈 걱정 없는 장애자녀의 미래설계, NGO가 정책 주도
30여 년 전 캐나다로 이민 온 황희철(가명・68) 씨도 딸 로즈(가명・32) 씨의 RDSP 계좌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11년째 이 계좌를 유지 중이다. “저희는 2014년 RDSP 계좌를 열었어요. 매달 딸에게 지급되는 장애인 수당(PWD・Persons with Disability Benefit) 약 1,400캐나다달러 중 500캐나다달러를 납입했습니다. 지난 11년간 총 5만8,000캐나다달러(약 5,800만 원)를 적립했고, 정부는 그에 맞춰 총 6만 4,000캐나다달러(약 6,400만 원)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원금만 총 12만2,000캐나다달러(약 1억2,000만 원)가 모였습니다.”
황 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돈을 안정적인 펀드에 직접 투자해 현재 잔고를 15만3,000캐나다달러(약 1억5,000만 원)로 불렸다. 그에게 이 돈은 딸의 ‘노후 보장’을 위한 든든한 안전장치다. 황씨는 “RDSP로 인해 미래의 재정 문제가 해결되면서 현재의 행복감도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딸의 일주일은 즐거운 활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교회 프로그램에, 화요일에는 미술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친구들과 모여 점심을 먹고 게임 하는 모임에 가고, 금요일에는 자원봉사를 합니다. 이렇게 잘 짜인 일과 속에서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부모나 주변 기관은 아이가 그 돈을 어떻게 잘 쓸 수 있을지만 도와주면 됩니다."
PLAN의 활동을 소개하는 메건 테일러리드 이사(왼쪽 사진)와
PLAN의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장애인 당사자 및 보호자 모습(오른쪽 사진)
캐나다 정부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RDSP 제도를 시작한 데는 장애인 부모 모임인 ‘플랜(PLAN, Planned Lifetime Advocacy Network)’의 역할이 컸다. 1989년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될까?’라는 부모의 고민에서 출발한 PLAN은 장애 자녀가 지역사회 내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 안전하고 좋은 삶을 누릴 방법을 모색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래 계획 지원에 필요한 다양한 제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세계 최초 등록장애인저축계좌(RDSP) 도입’, ‘대리인 협약(Representation Agreement) 개발’ 등의 성과를 이루었다.
물론 RDSP에도 아직 개선할 점이 남았다. 전체 자격자 중 RDSP 가입률이 35% 미만에 그친다. 제도가 있어도 그 존재를 모르거나, 신청 절차가 복잡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 결정이 어려운 중증 발달장애인의 경우, 계좌 개설 자체가 어려워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캐나다 정부는 부모나 형제자매가 대신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제도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 RDSP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장기 저축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막대한 재정 부담, 비과세 혜택을 위한 세법 개정, 기존 복지제도와의 연계 등 복잡한 법·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장애인의 미래를 위한 ‘투자형 복지’가 장기적으로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미래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캐나다의 사례가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한다.
장애인 노후를 위한 한국의 현주소는…
한국에도 저소득층의 자산 형성을 돕는 유사한 제도들이 있다.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자산형성지원 통장(이룸통장, 누림통장 등)’이 그것이다. 이 제도들은 본인이 일정 금액을 2~3년간 저축하면, 지자체에서 그와 같거나 일부 금액을 추가로 지원해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단기 저축 프로그램이고, 정부 지원금의 규모나 혜택의 폭이 RDSP에 비하면 제한적이다.
글=김은영 종로장애인복지관장
사진=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