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의 보통의 삶, 어릴 때부터 준비해야"
[푸르메 대담]
발달장애인이 자립하여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려면?
몇 해 전부터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탈시설 정책과 함께 커뮤니티 케어, 지역사회 통합 돌봄, 최근의 장애인 맞춤형 통합지원 정책까지 다양한 정책이 쏟아졌습니다. 정책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핵심은 하나입니다. 장애인이 자립하여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푸르메재단에서도 관심이 깊은 내용이지요. 장애인, 특히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려면 어떤 지원과 인프라가 필요할까요? 전문가 4인과 함께 이야기나눴습니다.
대담 참석자
- 백은령 총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푸르메재단 이사)
- 정병은 작은물결연구소 대표(발달장애 자녀의 자립을 준비 중인 부모)
- 김은영 종로장애인복지관장
- 최현주 푸르메재단 경영기획실장
(사진 왼쪽부터) 김은영 관장, 최현주 실장, 정병은 대표, 백은령 교수
“발달장애인의 보통의 삶, 어릴 때부터 준비해야 가능”
최현주(이하 최): 푸르메재단은 어린이들이 재활치료를 잘 받을 수 있도록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지었고, 발달장애 청년들이 보통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일터(푸르메소셜팜)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삶’이란 게 치료와 직업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지요. 그래서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잘 살아가려면 어떤 지원과 인프라가 필요한지 들어보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올해 설립 20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도 함께 고민하고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백은령(이하 백): 성인이 되어 지역사회에서 잘 살아가려면, 당연하게도 아이 때부터 잘 자라는 게 중요해요. 일찍부터 지역사회 안에서 장애아동과 부모가 함께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발달장애를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부모가 치료에만 몰두하지 않고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전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면서 자녀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김은영(이하 김): 제가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30년간 일하며 생각해 온 것과 똑같아요. 처음 자녀가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 부모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정말 막막하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우리 사회에 어떤 지원 정책이 있는지 알려주고, 복지관에서 자녀의 성장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요. 종로장애인복지관은 아래층의 푸르메어린이발달재활센터에 다니는 아이들과 부모‧보호자들이 있으니, 이들과 함께 ‘생애주기별 맞춤형 지원’이나 ‘평생설계’를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백: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를 만나보면, 안타까운 경우들이 있어요. ‘(장애)자녀를 정말 열심히 키웠는데, 결국 아이랑 나 둘만 남았다’고 해요. 배우자나 비장애 자녀, 다른 가족들과는 소원해졌다는 얘기죠. 이렇게 되기 전에, 가족의 삶을 전체적으로 멀리 바라보는 게 필요해요. 예컨대 비장애 형제의 입장에서 보면, 어릴 때는 부모님이 ‘얘(장애 형제)는 엄마 아빠가 책임질 테니, 너는 걱정 말고 네 길을 가도 된다’고 해요. 하지만 가족인데 영원히 모른 척 사는 게 가능할까요? 부모님마저 돌아가시면 장애 형제가 남아요. 어떻게 돌봐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요즘 가족 지원을 할 때 장애당사자를 빼고 다른 가족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장애당사자를 포함하여 앞으로 가족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게 돕는 지원이 필요해요. 부모의 생각도 바뀌어야겠죠. 어릴 때 종일 치료와 교육만 받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가 평생 치료나 교육 받는 대상일 수는 없어요. 아이도 언젠가는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하니, 멀리 보고 미래를 대비하면 좋겠어요.
백은령 교수
정병은(이하 정): 부모 입장에서 말하면, 발달장애는 어릴 때 진단받잖아요. ‘(정상 발달보다)1년 6개월 늦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진단을 듣자마자, ‘그 격차를 메워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내가 한 3~5년 열심히 치료(교육) 받게 하면 따라잡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떤 말도 귀에 안 들어오고, 오히려 치료(교육)를 안 받게 하면 제가 엄마노릇을 제대로 못한다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치료를 받지 않을 때마다 ‘혹시나 이 치료로 아이가 나아질 수도 있는데, 내가 못해줘서 잘못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무척 힘들었죠. 아이의 발달장애가 제 탓이 아님을 아는데도 그랬으니, 다른 부모는 더 힘들었을 거예요.
김: 그럴 때 부모에게 전문가가 현 상황을 쉽게 설명해 주면서 앞으로 어떻게 키울 것인지 함께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일을 각 지역의 복지관에서 오래 경험을 쌓은 가장 노련한 전문가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백: 그런 점에서 푸르메재단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어요. 병원과 복지관이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부모들은 믿을 만한 기관에서 진단 받기를 원하거든요. 발달장애 아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서 푸르메재단의 자원을 활용해서 차별화된 진단과 진료, 상담을 해주면 어떨까 생각해요. 발달장애 자녀를 어떻게 키울지 부모에게 가이드를 주는 역할이요. 이런 가이드가 없기에 부모가 불필요한 치료‧교육 비용과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니까요.
“부모가 자립한 자녀 모습 상상해 볼 기회 필요”
장애자녀를 둔 부모를 답답하게 만드는 요소의 하나는 정보 창구의 부재(不在)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여러 가지 정책이 생기고 바뀌지만, 그것이 장애당사자나 부모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주민센터에 찾아가 물어도 복지 담당 공무원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엄마들끼리 알음알음 정보를 공유하며 찾아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정: 호주의 경우, 복지 정보가 모두 모인 ‘센터링크(Centrelink)’가 있어요. 제가 센터링크를 보고 가장 감탄한 부분이 이용자에게 하는 질문이에요. ‘혹시 지금 실직했나요?’, ‘혹시 장애가 있나요’, ‘혹시 가족 중에 돌봐야 할 사람이 있나요?’…. 이런 내용을 죽 물어보고 이용자가 해당하는 내용에 체크하면,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종류’가 쫙 떠요.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서비스(복지로)가 있는데, 거기선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가요?’를 묻거든요. 이 둘은 완전히 달라요. 센터링크는 이용자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가를 묻고, 그 상황에서는 무엇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가 이런 지원을 하고 있으니 이용하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정병은 대표
최: 정 대표님은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고 자립 준비를 시키고 계시잖아요. 발달장애인이 잘 자립하려면 어떤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보세요?
정: ‘자립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모들이 답하기는 아주 힘들어요. 대부분 부모는 발달장애 자녀가 독립할 미래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성인이 된 자녀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어떤 직장에서 일하며, 어떤 이웃과 어떤 활동을 하면서 살까’에 대한 구체적인 상(像)이 없어요. 그러니 ‘자립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고, 실질적으로 자녀의 자립을 준비할 수도 없는 거예요. 자립한 자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나 제도가 있으면 좋겠어요.
백: 장애인복지의 패러다임이 재활 패러다임(Rehabilitation Paradigm)에서 자립생활 패러다임(Independent Paradigm)으로 바뀌었는데, 그동안 보호와 치료, 재활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부모와 장애당사자에게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니까 당황스러운 거지요.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장애인의) ‘자기 결정’, ‘선택’ 등의 개념을 많이 쓰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부모‧보호자와 장애당사자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게 중요하죠.
“지역사회 안에서 촘촘한 지원 받을 수 있어야”
최현주 실장
최: 장애인의 자립에는 지역사회의 역할이 큽니다. 포용적인 지역사회가 되기 위해 바뀌어야 하는 부분, 지역사회가 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백: 각 복지관이 해당 지역의 장애인만 확실하게 책임지면 돼요. 예컨대 종로장애인복지관이면, 종로구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영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한 명 한 명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거예요. 삶 전체를 놓고 보면서 시기별로 필요한 내용을 찾아내서 지역사회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맞춤형으로 지원하는 거죠.
김: 최근 복지관을 찾아온 분은 자녀를 독립시키기 위해 여러 공동주택을 알아봤는데, 자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 종로의 단독주택에서만 살았기에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다고 걱정했어요. 사실 발달장애인은 오래 거주한 낯익은 환경에서 사는 게 좋거든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복지관이 부모와 함께 고민하면서 방법을 찾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역공동체와 발달장애 당사자를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도 해야 하고요.
백: 일본 ‘베델의 집’이 장애인 자립의 좋은 사례예요. 홋카이도 우라카와 마을에 있는 정신장애인 시설인데, 정신장애 사례이기는 하지만 장애인의 지역사회 삶에 대한 함의를 찾을 수 있는 좋은 모델이지요. 과거 지역병원에서 일하던 정신과 의사와 사회복지사, 장애당사자 세 명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기관으로, 장애당사자들이 마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흩어져서 살아요. 혼자 사는 사람도 있고, 그룹홈에 살기도 하는데 아침마다 모여서 지역특산물인 다시마를 잘라서 포장하는 일을 해요. 베델의 집이 유명해지다 보니 이곳을 보러 일본 전역과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덩달아 지역 호텔이 호황을 누리게 되었어요. 베델의 집이 장애당사자 연구를 해서 매년 학술대회를 여는데, 지역 호텔에서 장소를 무료로 빌려줄 정도로요. 또 베델의 집 사람들이 호텔에 취업하기도 하고요. 장애인 시설과 지역사회가 함께 윈윈(win-win)하는 좋은 사례이지요.
정: 아이를 키우면서 지원이 필요할 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어요. 예를 들어 가족 지원을 받으려고 할 때 복지관과 장애인가족지원센터 중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모를 수 있어요.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위치의 장애인가족지원센터에 가서 문의하면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고 끝인 거예요. 제가 원하는 건 ‘우리 센터에서는 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지만 어느 센터에 가면 받을 수 있다’거나 ‘그 서비스는 없지만 우리 센터에서는 이런 지원을 제공하니 살펴봐라’ 같은 안내거든요. 센터마다 이렇게 분절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정부가 말하는 통합형‧맞춤형 서비스가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에요.
백: 국내법에 개인별 지원 계획을 수립하도록 돼 있어요. 미국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제대로 작동을 못 하는 상태예요. 호주의 ‘센터링크’처럼 정말 일상에 도움이 되도록 운영돼야 하죠. 해당 지역의 발달장애인을 영유아기부터 밀착하여 촘촘하게 지원하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김은영 관장
김: 복지관들이 지금 가장 고민하는 내용이 이 이야기와 연결돼요. 복지관이 프로그램만 이용하러 찾는 곳이 아니라 부모, 장애당사자가 전문가와의 깊이 있는 상담을 통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어떤 서비스와 정책을 이용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며 찾아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가 늘고 있지만, 그것이 적재적소에 연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요. 복지관이 지역 내 발달장애인을 어릴 때부터 밀착하여 지원하면서 시기마다 필요한 서비스를 찾아 연결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요. 우리가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푸르메재단 및 산하 복지관, 기관들과 협력하며 노력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가족, 친구, 이웃, 동료 등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장애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사회로 나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자립하여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푸르메재단이 재활치료부터 일자리, 지역사회 복지까지 장애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업을 펼치는 이유입니다. 푸르메재단은 앞으로도 15개 산하기관, 전문가들과 함께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이어가겠습니다.
글‧사진= 오선영 부장(마케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