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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말아요! 캠페인] 한비야,지도밖으로 행군하라.

“왜 오지로만 여행을 다니나요?”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수없이 받는 질문이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배낭을 꾸리게 한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게 하는 이 원동력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여행이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일이다. 해라트에는 금요모스크라는 아름다운 회교 사원이 있다. 탈레반은 유적지만 겨우 눈감아 줄 뿐, 거리나 사람들 사진 찍는 것은 일절 금하고 있는데 나는 이 곳에서 사진을 찍다 정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여기저기 몰래 카메라로 도둑사진을 찍는데 어느 건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총 든 탈레반 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프가니스탄은 군인들을 찍지 못하게 계엄령으로 선포해 놓은 탓에 군인들을 찍다 걸리면 누구를 막론하고 무조건 감옥행 이거나 심하면 총살형이다.

사진 한 장에 목숨을 잃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애꿎은 카메라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한참을 서있어도 군인들은 잡담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기회를 틈타 몰래 카메라를 들이대고 찰칵찰칵, 한 컷도 아니고 두 컷을 찍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군인 중 두 명과 렌즈 안에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머리 끝이 쭈뼛하면서 온 몸의 피가 발 아래로 빠져나가는 듯 힘이 쭉 빠졌다.

‘앗, 들켰구나.’

나와 눈이 마주친 군인이 다짜고짜 내 카메라를 빼앗으려 하면서 소리를 친다.

“당신 우리 찍은 필름 내놔.” “나는 당신네들 안 찍었어요.” “당신이 우리 찍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저 사원 건물 찍은 거예요. 당신들 사진 찍지 못하는 거 잘 알고 있어요. 큰일나려고 내가 사진 찍겠어요?” 짧은 페르시아어로 거짓말이 술술 잘 나온다. 내 어디에 그런 용기가 숨어있었나. 카메라나 필름이 목숨과 바꿀 만큼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한번 이들 법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

다른 군인들도 덩달아 내가 사진을 찍었다면서 단번에 험악한 분위기가 된다. 나와 마주쳤던 군인 중 하나가 병영 초소 쪽을 가리키면서 따라오라고 한다. 병영에 끌려들어갔다가는 끝장이다. 많은 종군 기자들이 병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따라가면 죽는다” 그 생각만 머리 속에 또렷했다. 나는 무조건 앞서 가는 군인의 팔을 두 손으로 잡고 매달리며 알고 있는 페르시아 말을 총동원했다.

“아저씨, 나 정말 안 찍었어요. 정말이에요. 이 카메라 필름 다 가져가도 좋아요.”

필사적으로 팔을 잡고 매달리자 난처한 것은 오히려 군인 쪽이 되고 말았다. 여자와는 말도 나눌 수 없는 초강경 회교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외국여자에게 팔목을 잡혔으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른다.

“당신, 정말 안 찍었어?”

그 군인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고 오히려 당당해지는 것은 내 쪽이다.

“정말 안 찍었어요.”

팔을 잡은 채 침착하게 대답하자 슬그머니 팔을 빼면서 그럼 빨리 사라지라고 쫓는 시늉을 한다. 안도의 숨을 쉴 새도 없이 정신 없이 숙소로 달려와 케냐 나이로비에서 노상강도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청심환을 먹어야 했다.

 


이 밖에도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즈군 지역을 넘어갈 때 느꼈던 킬링필드의 오싹함이 어제인 듯 생생하고, 캄보디아에서 태국으로 밀항하려다 태국 이민국에 체포될 뻔하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미친 개한테 물리기도 했고 인도차이나 여행 내내 팔뚝에 심한 땀띠가 나서 몹시 괴로웠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교통사고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적도 있고, 파키스탄 북쪽 빙하벌판을 건널 때는 천길 크레바스에 빠지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육체적인 어려움이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질병인 외로움에 비할까? 참고 참았던 외로움이 하필 생일날에 폭발해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펑펑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이런 힘든 일들은 귀하고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댓가다.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철들고 나서 내가 넘어온 산들을 따져본다. 국제 홍보라는 산. 세계 일주라는 산. 중국어라는 산을 넘어 지금은 긴급구호라는 산을 오르고 있다. 이제 5년 차이지만 이번 산은 워낙 크고 높아서 정상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다. 겨우 3부 능선쯤 올라온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오래 걸릴 것을 각오했기 때문에 진도가 더디게 나간다고 답답해 하거나, 어느 천 년에 정상까지 가냐며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곧 7부 능선, 8부 능선으로 올라가면 조금씩 시야가 트이고, 어느 순간 까마득했던 정상이 눈앞에 나타나면서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일 때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나에게 내려진 절체절명의 명령소리가 들린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1958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국제 홍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홍보회사 버슨-마스텔라에서 근무하다 사표를 던지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 후 7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세계 오지 여행 경험을 담은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전4권)」,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걸으며 적어내려간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중국어 공부를 위해 한 해 동안 머물렀던 중국에서 쓴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등을 썼다. 네티즌이 만나고 싶은 사람 1위, 닮고 싶은 여성 2위, 여성특위가 뽑은 신지식인 5명 중 한 명, 평화를 만드는 100인(문화일보 주체) 등에 선정되었고, 2004년 ‘YWCA 젊은지도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제 NGO 월드비전에서 긴급구호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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