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완강한 어린 시절

고정욱(아동문학가)



[아들 범준이와 함께 백두산 천지에 올라]



  • 푹푹 찌는 초여름 날이었다. 단열의 개념도 없던 시절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인 교사는 오전 내내 달아오르더니 오후부터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5교시는 체육이다. 점심 도시락을 까먹은 학생들은 하나 둘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더위에 나가 뛸 생각에 혀가 저절로 입 밖으로 빠져 나왔다.

    목발을 양쪽에 짚어야 간신히 걷는 일급 지체장애인 동구는 늘 그렇듯 점심을 먹고 화장실까지 힘겹게 다녀온 뒤 공부를 위해 참고서를 폈다. 체육 수업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체육시간에는 그 주의 주번이 남아서 교실을 지키게 되어 있었지만 동구네 반 주번은 그런 혜택을 한 번도 입지 못했다. 동구가 있기 때문이다.

    동구가 영어 책을 펴고 단어를 외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대부분 교실을 빠져나갔다. 미리 나가 축구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면서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다.

    교실이 조용해질 무렵 다른 반에 놀러 갔던 녀석이 허겁지겁 들어와 황급히 체육복을 갈아입다 부러운 눈치로 동구에게 말했다.

    “동구 너는 좋겠다.”

    “뭐가?”

    “이렇게 더운 날 우리는 나가서 뺑이 치는데 시원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고….”

    “…….”

    그날 동구는 사람이란 철저히 지기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견고한 사실이었다. 과연 장애란 게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느라 펼쳤던 영어책의 단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그렇게 체육시간을 땡땡이 치고 공부한 덕분인지 동구는 학업 성적이 그런 대로 괜찮았다. 자신이 원하는 학과인 의대를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동구가 의대를 목표로 삼은 건 전적으로 무지에 의해서였다. 혼자 힘으로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아들을 보고 동구의 부모님은 생각했다. 무슨 직업을 가져야 이 아이가 먹고 살 수 있을까. 가만히 앉아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상체를 움직여 할 수 있은 일거리가 뭘까. 어떤 직업이든 몸을 움직여야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6, 70년대이니 그럴 법도 했다. 그 결과 부모님은 병원의 의사라는 직업에 착안했다. 그들은 그저 흰 가운 입고 앉아서 환자가 들어오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청진기나 몇 번 스탬프 찍듯 몸에 눌러보고 처방전을 써주는 게 일이다. 저 정도면 당신들의 아들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넌 의대를 가라. 그래서 너같이 불쌍한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게 좋겠다.”

    동구도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게다가 동구의 집 부근은 대학들이 몰려 있는 대학촌. 통학도 그리 불편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청천벽력은 옆 반의 비슷한 처지에 있던 장애아가 갑자기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하면서 벌어졌다.

    “장애를 가진 학생은 의대를 못 간단다.”

    “그래서 문과로 옮긴 거래.”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뒤늦게 동구도 이과 진학이 어렵다는 걸 알고 말았다.

    “아니 그럼 무슨 과를 가야 하나요?”

    “글쎄? 학교마다 달라서.”

    담임선생님도 뭐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동구는 갈 만한 대학마다 찾아다니며 입학 여부를 물었다. 의대는 물 건너갔다고 쳤다. 그러면 공대는 어떤가. 공대는 기계를 만지면서 실습을 해야 한단다. 이빨도 안 들어갔다. 자연계 순수과학은 어떤가? 실험을 했다 하면 밤을 새면서 서있어야 한단다. 당연히 불가였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공부해온 모든 노력이 수포였다. 미술에 약간의 재능이 있던 동구는 미대에라도 가보려고 기웃거렸다. 그곳조차 고개를 저었다.

    체육시간에 땡땡이 친 보람도 없이 동구는 아무 쓸모없는 이공계 공부만 죽어라 한 셈이 되고 말았다.

  • 우여곡절 끝에 동구는 대학생이 되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원서를 넣은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한 것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과에 합격해 생각지도 않은 공부를 해야 하는 운명이 기구했다. 게다가 국문과의 별명이 ‘굶는 과’라는 데에는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디 한번 해보자는 장애인 특유의 잡초 같은 근성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남들이 쓴다는 소설도 써보고, 문학에 대한 기초 공부도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적성이고 취미고 무시하고 어떻게든 배겨내야 했다.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는 강의실을 시간표대로 쫓아다니느라 목발 짚은 겨드랑이와 손바닥에 굳은살이 두툼하게 박혔다. 이 강의실에서 저 강의실로 옮겨 다닐 때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계단으로 건물 한 층 올라가려면 5분씩 시간이 걸렸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는 할 만했다. 조금씩 취미도 붙었다. 대학 생활도 그런 대로 재미있고 행복했다. 매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졸업을 할 때가 되자 불안이 엄습했다. 취직을 해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사귀는 여자 친구도 생겼기 때문이다. 모 광고회사에 원서를 넣었더니 서류심사에 통과되었다. 서류 심사 통과자에 한해 필기시험을 보았다.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회의실에서 필기시험을 보았다. ‘10원짜리 동전이 100원짜리 동전보다 유용한 경우’와 같은 창의성을 요구하는 엉뚱한 문제들이 많았다. 흥미로웠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나중에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절대 없었단다.

  • 사회의 진출을 미룬 동구는 대학원을 진학했다. 어차피 문학이라는 게 단기간에 업적을 내거나 승부를 걸 수 있는 학문은 아니었다.

    어느 날 동구의 여자 친구가 등나무 벤치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어머니가 알아버렸어.”

    그녀는 그 동안 동구와 사귄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를 만났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녀의 어머니가 둘의 교재를 알게 된 거였다. 네가 집을 나가든지 내가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하자는 어머니의 폭탄선언을 여린 그녀는 견딜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것이 장애인의 숙명. 동구는 그녀를 놓아 보냈다. 직업도 없고 공부하는 백면서생의 신분에 장애를 가진 몸만 남았다. 찢어지는 고통과 세상에 대한 원망도 늘 그렇듯 홀로 삭이며 이겨내야만 했다. 동구의 20대는 그렇게 암울한 회색빛으로 물들어만 갔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서야 동구는 알게 되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사랑의 고통에 눈물 흘려도 떠나보내는 게 아니었음을. 고통을 이겨내도록 격려하고, 나중에 그 고통을 이겨낸 보상으로 평생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동구와 헤어진 그녀는 결국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 사랑의 의욕을 잃었지만 동구는 대학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공부도 재미있었다. 창작을 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남이 써 놓은 작품을 읽고 분석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일도 보람있는 것이었다.

    석사학위를 받자 이번에는 박사과정에 입학해야 했다. 하던 공부를 그만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라는 직업이 매력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박사과정을 마칠 무렵 드디어 대학원 학생들에게 강의가 한 강좌씩 배당되었다. 지금까지의 학생 입장에서 이제 바야흐로 선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기대에 부풀었다. 교수님 소리를 듣는 명예로움이 가슴 부풀게 했기 때문이다. 동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정말 잘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용히 동구를 찾아온 조교는 무척 안 되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동구야. 너만 강의 배정이 안 되었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그랬다. 그들은 동구에게 한 마디 의사도 물어보지 않았다.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서 너무나도 친절하게 배려를 해주었다.

    그날부터 동구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그 대신 장애인의 삶은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의지와 상관없는 비장애인들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삶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그 다음 학기에 강의를 배정 받은 동구는 현재 17년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참 강사가 되었고 박사 학위도 받았다. 책도 여러 권 써서 제법 이름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부초 같았다. 공부한 사람의 귀착점인 대학에서 그에게 자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에게도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지방의 모 대학에 딱 그를 위해 만든 것 같은 자리가 났다. 득달같이 서류를 보냈더니 심사에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되어 면접을 했다. 총장은 그를 좋게 봤다. 밝고 명랑한 성격이 충분히 교수로 채용해 쓸 만하다고 여겼다.

    인사권을 가진 재단 이사장은 병원을 해서 돈을 번 사람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사였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면접에서 자신의 조카도 동구와 같이 지체장애인이라고 했다. 서광이 비쳤다. 이제 긴긴 방황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들려온 소식은 그것이 아니었다. 재단 이사장이 면접을 마친 뒤 학교의 비서실 직원을 호되게 야단쳤다는 거다. 다음과 같이.

    “명색이 의사이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내가 장애인을 차별해 탈락시켰다고 하면 우리 병원과 학교가 얼마나 평판이 나빠지겠나? 이런 사람은 자네들이 알아서 서류심사에서 탈락시켰어야지. 내가 손써야만 해?”

    그것은 완강한, 너무나도 완강한 어조였다고 한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동구는 나의 어릴 때 이름입니다.



이 글을 쓴 아동문학가 고정욱씨는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부회장과 장애인을 위한 새날도서관 관장 등 장애인 복지 실현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돼 등단한 이후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안내견 탄실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MBC 느낌표에 <가방 들어주는 아이>가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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