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중생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원택 스님(푸르메재단 이사, 파라미타청소년협회 회장)




불교에서 ‘자리이타’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그저 쉽게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인데,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자신을 먼저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냐,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자신은 돌보지 않고 남부터 이롭게 해야 하느냐 하는 등으로 이해가 갈라져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왔습니다.


요즘 세상에 비추어본다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은 ‘수행’일 것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봉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인들에게 ‘수행’이 먼저인가, ‘봉사’가 먼저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먼저 떠올리는 것처럼 불교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종교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에 반해 가톨릭이나 기독교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사람들마다 조용한 듯 보이는 불교의 그런 점이 좋다는 사람도 있고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그런 활발한 면이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봉사 측면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불교가 뒤쳐져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타보다는 자리 쪽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도 스님이 되고 30여 년이 지나도록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 12월에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모금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분들이나 시설을 찾아 소개하고 모금을 통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시청자들의 관심을 갖게 하는 방송입니다. 저는 충주에 있는 ‘진여원’이라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집이라 하기에도 옹색한 허름한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로 버림받은 어린 아이들이 주로 살고 있고 지체장애 원생도 있었습니다. 24명이 모여 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장 월 200만원 정도 드는 난방비가 빠듯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밝고 커지면 커질수록 바라보는 제 마음 한 구석이 찡해 왔습니다.


그런 제 마음이 방송을 통해 전해진 것인지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감동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평소 모금액은 8,000만원 정도였는데 이 날 방송에서는 무려 2억 4,000만원이 모금되었습니다. 프로그램 시작 이후 최대 모금액이라느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스님이 방송에 출연하여 종교간의 화합이 이루어낸 성과라느니, 하며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금액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불자들의 힘이 모아졌다는 데에 꽤 뿌듯해했던 기억입니다.


▲ 해인사 백련암에서 시자스님들과 포행하시는 성철스님. 왼쪽부터 원융, 원영, 성철, 원택스님


그러다가 문득, 그동안 사회에 봉사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얼마나 보지 못했으면 이 방송에 이런 열의를 보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금액이 많이 모인 것이 갑자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스님들의 모습은 어쩌면 봉사하는 모습인데, 스스로는 수행하는 모습만이 스님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성철스님께서도 이런 법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에서는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입니다.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주는 것이 불공이 아니며, 남을 도와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노릇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가 봉사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멜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을 자나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만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내 팔아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 기준을 남을 돕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를 위한 기본적인 마음 가짐을 참회로 강조하셨습니다.


▲ 원택 스님


“우리가 부처님 앞에 절을 할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절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게 항상 다니는 신도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은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남을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하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고 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으니 기도한 공덕이 많은데 이것도 모두 중생에게 가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원합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하오며…’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참회법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자세이며,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참회와 회향이 불교인들이 봉사하는 데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수행이 곧 봉사가 되고 봉사가 바로 수행이 됩니다. 이런 것이 없이 섣불리 뛰어들기 때문에 간혹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디 불교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떠나 봉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말씀인 것 같아 할애된 지면을 빌어 전해드립니다.


원택 스님

경북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신 뒤, 1972년 성철스님의 문하로 출가했습니다. 1987년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조계종 총무부장을 역임하신 뒤 현재 파라미타 불교청소년협회 회장과 푸르메재단 이사, 녹색연합 공동대표로 일하고 계십니다.

1998년 문화부장관 표창과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저서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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