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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모든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 “차인홍” 교수

<샘터> 2004년 9월호 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글 신주영 기자 l 사진 하형우 (샘터사)

재미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차인홍 교수(45세). 만약 신이 특별히 더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아마도 그는 맨 앞자리를 맡아 놓은 사람일 것이다. 그가 이제껏 지나온 인생 여로에는 신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결코 건너지 못했을 난코스가 굽이굽이 참 많았음에도 굳건히 잘 헤쳐 온 것을 보면 말이다.
대전에서 구멍가게 집 육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차 교수는 두 살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 형편까지 어려워져 초등학교조차 보낼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장애가 있는 여덟 살배기 아들을 무료 재활원에 맡겼다. 거기에서 그는 훗날 일생의 동반자가 될 바이올린을 처음 만났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가난한 시골 소년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바이올린을 만지게 된 것은 한 음악가의 헌신과 사랑 덕분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민자 선생. 당시 저명한 연주가였던 그는 변변한 놀이기구도 없이 지내는 재활원 학생들을 위해 자원해서 바이올린 레슨을 해주었다.“누구나 음악을 좋아하겠지만 저는 좀 더 특별했습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내 안의 어떤 상처 같은 게 부드럽게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게다가 강 선생님께서 제게 재능이 많다면서 늘 용기를 북돋워 주셔서 더 열심히 연습했어요.”그는 간신히 마련한 5천 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게 된 지 1년 만에 도내 콩쿠르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걷지도 뛰지도 못했던 아이, 신체적 열등감에 잔뜩 주눅 든 소년 차인홍은 난생 처음으로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그러나 친구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재활원 한켠에서 아무런 꿈도 비전도 가지지 못한 채 암울한 미래와 대면하고 있어야 했다. 장애인을 환영하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꿈이 없다는 것, 꿈을 가질 엄두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이 비참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는커녕 내 힘으로 내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암담했습니다.” 그는 당시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몇 년을 그렇게 비참한 심정으로 헤매고 있을 때, 강민자 선생의 후배인 고영우(당시 목원대 강사) 선생이 그를 찾아왔다. 재능이 아깝다며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하라고 채근했던 것. 그 일을 계기로 재활원의 장애인 친구 네 명이 모여 결성한 것이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이다. 그는 막연하게나마 바이올린을 통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기쁨에 퀴퀴한 연탄광에서 칼바람을 맞아가면서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다. ‘성실’ 이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검정고시로 고등 과정을 마친 그는 아산재단의 지원으로 뜻하지 않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뒤 뉴욕시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 대전시향 악장을 거쳐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지휘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4년 전 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오하이오 라이트주립대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발탁되었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도 역시 종이 양면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그러나 고비의 순간마다 그는 희망을 되새겼다고 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자신의 일처럼 사랑을 베푼 아내와 친구들, 스승들이 있었으며, 보이지 않는 어떤 보살핌이 항상 그를 뒤따랐다. 그 덕분에 불가능해 보이던 일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능한 현실로 바뀌었다고 그는 믿는다. 그의 말대로 차인홍 교수의 인생은 그를 위해 기꺼이 다리가 되어 주었던 모든 이가 함께 빚어낸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장애가 오히려 저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음악을 했을 리 없고,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많이 계신다는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도 저를 보고 희망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이 너무 크다고 느낀다면 이룰 수 있는 꿈도 그만큼 클 것입니다.”

그는 지금껏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 앞으로는 주는 사랑만 하고 싶다고 했다. 강의와 연주를 병행해야 하는 바쁜 일정이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찾아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정기 연주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차인홍 교수는 오는 시월에 한 교회에서 주최하는 음악회를 위해 다시 서울을 찾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