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을 모아 희망을 이야기하는 푸르메재단 [업코리아] 2004-11-9

이영섭 기자 (nevermind@upkorea.net)

이 땅에 사는 장애인들의 새로운 희망 찾아 나선
푸르메재단


▲ 다리가 불편한 황씨에 맞게 설계된 일산집

고봉산 한 자락에 위치한 일산 외곽의 한 주택단지. 도심 생활이 가져다주는 번잡함을 피해 시골 같은 환경에서 살길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마을사람들이 출근하고 자동차 소리 마저 끊긴 오전 9시, 황혜경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집을 나선다.

다른 주부와 마찬가지로 황씨의 아침은 늘 분주하다. 6시 50분 기상. 먼저 딸 민주를 깨우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가족이 모여 앉아 빵과 우유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7시 50분 남편과 민주가 집을 나서면 황씨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요즘 한가지 다행이라면 늦잠꾸러기였던 딸애가 5학년이 되면서 부쩍 어른스러워졌다. 지난해까지 매일 입을 옷과 책가방까지 챙겨주고 아침마다 서두르라고 잔소리를 했는데 올부터 야단맞는 일이 없어졌다. 혼자 모든 일을 해내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가끔 엄마의 운동을 돕겠다고 황씨는 눈물이 핑 돈다. 다른 엄마처럼 운동회도 참석하고 담임선생님도 찾아 뵙고 싶은데 늘 마음뿐이다. 엄마 때문에 너무 일찍 철든 것 같은 딸애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황씨는 집을 나서기전 단단히 준비를 한다. 우선 몸을 깨우기 위해 커피 한잔을 마신 뒤 얼굴과 손이 타지 말라고 선크림을 꼼꼼하게 바른다. 삼복중에도 긴소매 옷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최근 구한 골프 장갑으로 무장한 황씨의 모습은 영락없이 밭매러 가는 농사꾼의 모습이다. 이사 온 첫 해 여름 아무런 준비 없이 운동을 시작했다가 큰 낭패를 당했다.

마을 어귀로부터 집안까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할 수 있게 지어졌지만 몇 년 전에는 왜 그렇게 집 나서기가 무서웠는지! 건강할 때는 몰랐지만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그렇게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땅바닥이 조금만 평평하지 않아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 사고전 영국을 여행할 때의 모습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얼굴과 팔이 직사광선과 자외선에 노출되면서 불에 댄 듯한 고생을 당한 뒤 완전 무장을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민주는 새까매진 얼굴과 손을 보면서 엄마가 토인 같다고 놀렸다. 그래 걸을 수만 있다면 토인이라도 얼마나 좋으랴! 황씨는 폭우가 쏟아지는 장마철이나 눈 덮인 엄동설한을 빼곤 매일 3시간씩 동네를 오르내리며 걷는 운동을 한다. 등에 복대를 잡아줘도 두 걸음도 못 가고 비틀거리던 때가 언제였나 옛날처럼 까마득하다.

지난해부터 지팡이 두 개를 짚고 조금씩 혼자 걷게 되면서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혼자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난다. 그동안 땅만 보고 걷다가 이제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 큰 기쁨이다.

귀국한 지 한 달만에 예전에 살던 시내 아파트를 팔고 남편이 설계한 이 집을 지어 이사왔다.

죽은 것보다 고통스런 장애인의 삶

걷는 운동을 할 때 친정어머니나 집안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뒤에서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수 십 번 부상당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자기가 혼자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평생 휠체어에 의지한 채 남은 인생을 살아갈 거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다른 장애인들은 훨훨 날아가는 꿈을 꾼다는데 황씨는 꿈에서도 휠체어를 탔다. 자신이 죽어 땅에 묻힌 뒤 왼쪽 다리가 없는 유골을 발굴하고 사람들의 놀라는 꿈도 꿨다.

악몽에 시달린 밤에는 유난히 교통사고로 잃은 왼쪽 다리가 마치 살아 있는 듯 가려웠다. 이런 밤이면 어김없이 수술부위가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통증이 새벽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살면 뭐하나?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힘들었다. 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죽는 것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앉아서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앉아서 바라보는 세상과 서서 마주 대하는 세상이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장애인이 된 뒤 비로소 느꼈다. 왜 나는 장애인이 됐을까? 사고 전 그녀에게 장애란 남들이 당하는 불행이었고 장애인이란 그렇게 운명지어진 특수한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남편이 한 재단의 지원으로 2년 동안 독일 연수를 떠날 때 그녀는 선뜻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이 있었고 12년 전 홀로 되신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남겨둔 채 신부가 되겠다고 신학대학을 입학한 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새로운 생활을 위해 독일 행을 결심했다. 2년 간의 독일 생활은 그런 대로 행복했다. 부부기숙사에살며 대학 때로 돌아간 것처럼 열심히 독일어 공부도 했고 뮌헨의 슈바빙 거리를 거닐며 서서 맥주도 마셨다.

후딱 지나가 버린 2년. 그리고 한 달 뒤면 귀국. 귀국날짜를 손꼽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 딸 민주와 함께 영국으로 마지막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와 글래스고우를 돌아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딸아이의 옷가지를 챙기러 트렁크 문을 여는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삶과 죽음 사이를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다 두 달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아!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을까? 꿈속처럼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왜 남편은 바보처럼 울기만 하는 것일까? 얼굴이 반쪽이 된 친정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황씨의 몸에는 10여 개의 주사바늘이 꼽혀 있었다. 그런데 왜 왼쪽 다리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이건 꿈이라고 외쳤다.

"여보! 내 눈이 잘못 됐나 봐! 왜 한쪽 다리가 보이질 않지?"

황씨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백야! 그녀에게 백야는 자정이 다 되야 해가 지고 새벽 3시면 뿌옇게 세상이 밝아오는, 축제와 무도회의 배경이 되는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였는데 난생 처음 그녀가 맞게된 백야는 중환자실에 누운 채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백야였다. 편두통을 앓고 있다는 가해자는 그날 따라 증상이 너무 심해 두통약 4알 먹고 운전을 하다 정신을 잃고 사고를 냈다고 한다.

백만분의 1의 확률이 그녀에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출혈로 생명이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라 다리절단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게 불행의 마지막이기를 바랬지만 신은 그녀에게 더욱 가혹했다. 수술부위의 감염으로 신장기능이 정지하면서 합병증상이 그녀를 혼수상태로 몰고 갔다.


▲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직후 영국병원의 담당간호사와 함께

그녀는 1주일 간격으로 2번이나 더 자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42도가 넘는 고열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혼절을 했다. 고통을 주신 신은 마침내 그녀를 살리기로 결정하신 때문일까? 황씨는 두 달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동안
황씨의 곁에는 두 명의 간호사가 24시간 간호했다고 한다. 영국 간호사들은 그녀가 42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자 한시도 쉬지 않고 얼음 마사지를 하고 혼수상태에 있는 그녀에게 주사를 놓을 때도 일일이 약의 효능을 설명하고 '당신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담당 의사는 황씨가 혼수상태일 때도 그녀의 가족을 찾아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림까지 그리며 그녀의 몸 상태를 설명했다.

의료진의 정성이 자신을 살린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다.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사고 후 처음으로 그녀는 간호사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병원 정원을 산책했다. 사고를 당한 때가 초여름이었는 그때 벌써 북구의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 달 넘게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변함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겨우 몸을 추스린 황씨는 비행기로 집이 있는 독일 뮌헨 병원으로 이송됐다. 독일 병원에서는 가혹하리 만큼 황씨에게 본격적인 재활훈련을 시켰다. 굳어진 근육을 주무르고 누울 힘도 없었던 그녀는 강제로 평형대에 세워졌다.

처음으로 두 팔로 평형대를 잡고 서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걷을 수 있을까? 아니 평생동안 혼자 힘으로 설 수나 있을까? 영국 의료진 달리 독일 의료진은 그녀에게 혹독할 정도로 훈련을 시켰다. 힘이 든다고 호소하면 할수록 훈련의 강도는 높아졌다. 두 번이나 전쟁을 겪은 경험일까? 지독한 독일놈들! 하는 욕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지옥 훈련이 효과를 나타낸 것일까? 넉 달 동안 독일 병원생활을 마치고 그녀는 비로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희망을 품고 고국으로!

혼자 굳었던 팔다리가 풀리고 휠체어를 굴릴 힘이 생길 정도가 되자. 의료진은 마침내 그녀에게 귀국을 허락했다. 이제 한국까지 12시간의 비행기간을 견딜 정도로 몸이 회복됐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그녀는 1999년 11월 장애인이 되어 밟았다. 하지만 한국은 장애인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기는 건강할 때도 버스를 타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던 곳이 아니던가? 장애인을 위한 재활병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유명한 병원에는 수 백 명의 환자가 늘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천신만고라고 해야 할까? 수소문 끝에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재활병원에 입원한 날을 황씨는 잊지 못한다.

TV는 자정이 넘도록 켜져 있고 병실은 인파로 넘쳐났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병원이 아니라 시골장터와 다름없었다. 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 10시가 넘어서도 불쑥 찾아오는 방문객들. 병동 가득 진동한 음식물 냄새, 환자가족과 간병인으로 밤이 되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변하는 병실. 이런 환경에서는 환자뿐 아니라 간병하는 사람도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는 듯했다.


▲ 최근의 모습

오전오후 40분씩 한차례 있는 작업치료와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환자와 외래환자가 한데 어울어져 치료실은 물론 복도까지 환자들로 넘쳐났다. 서부 유럽에서 가장 낙후됐다는 스코틀랜드 병원에서 한 사람이 사용할 공간을 한국에서는 몇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지 시험을 하는 듯했다. 한 평이 되는 평상 위에서 세 네명의 환자가 어깨를 부딪히며 물리치료를 받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하루는 황혜경씨와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를 보기위해 10여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환자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갑자기 병실에 있던 간병인들이 환자를 휠체어에 앉히고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하던 황씨는 조금 뒤 그 이유를 알았다. 교인들이 한 시간이 넘게 울부짖는 통성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황씨가 나중에 병원측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항의했지만 '그게 뭐 문제가 되느냐, 세상물정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우리병원은 왜 이럴까? 불러도 대답 없는 의료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하루종일 창문을 매달린 환자들! 새벽부터 방문객들로 넘쳐나는 병실! 병원 입구마저 주차장에 빼앗긴 채 로비를 서성이는 휠체어 행렬! 장소가 없어 목발을 짚고 복도를 오가며 운동하다가 다른 환자의 휠체어에 치여 넘어지는 것이 우리 재활병원의 현실이었다. 아비규환 같은 이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수 백 명의 환자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니 할말을 잊었다.

재활환자에게는 정신적인 안정과 환경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한국의 재활병원은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황씨는 자신이 영국과 독일에서 경험했던 병원이 한국에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장애환자의 새로운 희망을 위하여!


▲ 독일 재활 병원의 전경

고층 콘크리트 병동과 주차장으로 변한 정원이 아니라 환자와 의료진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잔디와 흙을 밟으며 산책을 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 수 없을까?

온가족이 환자를 간호하는데 매달리고 환자의 인격이 무시되는 병원이 아니라 장애의 아픔을 이해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가 가족처럼 환자를 보살피는 병원을 지을 수 있다면...

하지만 이런 병원을 기대하는 것은 황혜경씨 만의 바람이 아니다. 매년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통사고나 뇌졸중 등 후천적인 장애로 쓰러지고 있고 470만 명이 넘는 장애인중 절반 정도가 지속적인 치료나 교육을 원하고 있다. 정말 이 땅에 그런 인간적인 재활전문병원이 세워질 수는 없는 일일까?

지난 8월 17일 한국프레스센타 19층에서는 조그만 모임이 있었다. 황씨를 비롯한 수많은 장애인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푸르메재단(www.purme.org)이 창립발기인대회를 가진 것이다. 푸르메재단! 장애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푸른 희망을 주기 위해 결성된 푸르메재단은 황씨가 꿈꾸던 환경 친화적이고 환자중심의 재활전문병원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사장을 맡은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을 비롯해 강지원 어린이 포럼대표, 김성구 샘터사 대표, 김용해 서강대 학생처장, 파라미타 불교청소년단체 회장인 원택 스님, 조인숙 다리건축 대표 등 각계인사가 이 곳에 참여했다. 푸르메재단은 교통사고나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길 원한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가 환자를 내 가족처럼 보호하고 치료하며 환자가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병원, 환자를 중심에 두고 작은 목소리에도 응답하는 병원을 꿈꾼다.

하지만 이런 병원이 건립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정성이 모아져야 한다. 개미군단 같이 수 많은 시민과 기업이 모여 나눔으로 개미사랑을 실천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지원뿐 아니라도 좋다. 기꺼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장애로 고생하는 환자들과 함께 하는 마음이 모아져야 한다.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이 모여 정성을 모은다면 기업이 동참하게 될 것이고 결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발벗게 나서게 될 것이다. 시민과 기업이 기금을 모으고 서울시와 경기도 등 지자체가 병원을 지을 땅을 빌려주고 정부가 재정적인 지원을 한다면 푸르메재단에서 꿈꾸는 병원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세워질 수 있다. 지금은 푸르메재단이 계획하고 있는 병원은 수도권에 하나지만 이런 운동이 확산된다면 수도권 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 광주, 강릉 등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 푸르메재단 창립 발기인대회 모습

작은 힘이지만 온 몸을 던져 이룩한 성공이 아름답다. 큰돈도 필요하지만 작은 정성을 모은 손길이 더욱 아름답다. 조그마한 벽돌이 모여 거대한 성채가 완성되듯이 작은 관심과 정성이 모여 우리 사회에 고통받고 있는 재활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삶의 의지를 불어넣게 될 날을 푸르메재단은 꿈꾼다.

황혜경씨 소원은 앞으로 건립될 푸르메병원에서 자기보다 훨씬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을 격려하고 상담하는 일이다.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자원봉사자. 그 날을 꿈꾸며 그녀는 오늘도 집을 나선다. 비록 지금은 두 개 지팡이에 의지하지만 혼자 힘으로 걷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그녀는 심호흡을 가다듬는다.

이영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