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화두 <장애환자 전문병원 건립> <조선일보>

[조선일보 기고] 장애환자 전문병원을 세우자


▲ 김성수 푸르메재단 이사장 / 성공회대 총장

몇 년 전 독일 사회에서 짤막한 신문 기사 하나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수백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의 사장이 은퇴하면서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고 회사는 30대 중국인 직원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 중국인 직원은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사장은 “첫째 아들은 5년 안에 회사를 말아먹을 것이고, 둘째는 현 상태대로 유지할 것이지만, 이 직원은 회사를 몇 배 성장시킬 것으로 확신한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건네던 대기업 CEO들이 이제는 수해 현장에서 땀방울을 흘리고 보건복지부 장관이 독거(獨居) 노인을 위해 연탄 배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사활동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10대 기업의 기부금도 올해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기업체 홍보 차원에서 시작된 봉사활동이 간부와 신입사원들이 한데 어울려 망치질을 하고 낙후된 지역을 찾아가는 주요 사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삼성화재는 매년 시각장애인에게 안내견을 전달하고, KT는 청각장애인의 소리찾아주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승객들이 여행하고 남은 동전 25억원을 모아서 유니세프에 기부했다. 재활전문병원 건립이 목표인 푸르메재단이 설립되자 삼성SDS 직원들이 후원회를 결성해 감동을 주더니 최근에는 장애인 사진전에 두 기업이 흔쾌히 후원해 “정말 기부문화가 변모하고 있구나”하고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기업과 개인이 사회공헌 사업과 후원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정치적 민주화’와 ‘내몫찾기’가 화두였다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 ‘나눔’이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됐다. 아름다운재단 박원순 변호사의 말대로 성공으로 이끄는 습관인 나눔이 어느덧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아직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장애환자들이다.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장애환자 수가 국내에 무려 140만명을 넘는다. 푸르메재단 일을 하면서 절망할 때가 많다. 교통사고와 뇌졸중 등으로 중도장애를 얻는 사람이 매년 30만명씩 증가하고 있지만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상이 전국적으로 4000개에 불과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시간에도 수천명의 장애환자와 가족들이 병상을 찾아 유령처럼 전국의 병원들을 떠돌고 있다.

왜 이럴까. 그 이유는 선천적인 장애뿐 아니라 살다가 입는 장애까지 철저하게 개인적인 문제로만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발벗고 나서주길 바란다. 외국의 경우 정부와 지자체가 재활병원과 장기요양센터를 세운 뒤 전문가와 사회단체로 구성된 민간에 운영을 위탁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재활병원을 지을 수 있는 부지만 제공하더라도 문제 해결의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사회공헌 기업과 시민도 뜻을 모은다면 150병상 정도의 재활전문병원을 매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재활병원건립운동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찬 일이다. 우리 모두 나도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으니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시작하자.

그래서 전국 어딜 가도 장애전문 병원을 찾아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그때가 되면 우리나라 대통령도 퇴임 후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처럼 집지어주기운동을 이끌고 영부인도 장애인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행복한 뉴스를 접할 수 있지 않을까.

김성수 ·푸르메재단 이사장/성공회대 총장
200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