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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여름사나이 ‘클론’의 강원래 [월간 샘터]

힘내라고요?  이미 힘은 넘치는 걸요!”

-솔직한 화법의 여름 사나이 ‘클론’의 강원래

 

취재, 글 박혜란 기자 | 사진 한영희

  월드컵 응원 열기의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붉은 티셔츠와 리본이 어지럽게 넘실대고 흥겨운 음악이 심장을 쿵쿵 두드리는 무대 위에서 그는 노래하고 춤췄다. 새삼스레 짚고 넘어가자면, 그의 직업은 댄스 가수인 것.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휠체어 댄스’라는 새로운 안무를 선보인다는 것 정도.

독특한 캐릭터의 남성 댄스 듀오 ‘클론’의 멤버로 인기를 누리며 대만에까지 유명세를 떨쳤던 강원래 씨(38세)는 5년 전 당한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다시 댄스 가수를 하는 것만은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다른 걸 할 마음이 없었다. 남들은 1, 2년 걸린다는 재활치료를 5개월 만에 마치고 활동을 재개할 준비를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는 다시는 걷지 못한다’는 걸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자 비로소 다시 댄서가 될 수 있었다, 는 그 말이 너무 거침없어서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기까지 그 홀로 겪어낸 시간이 있었으리라, 타인은 그저 어림짐작해볼 뿐이었다.

축구 좋아하세요? 2002년 월드컵 땐 어떻게 보냈습니까?
응원했지요. 집에서도 하고 거리에도 나가고, 주차장에서도 봤네요. 이번 월드컵 때는 일부러 무대에 많이 서려고 해요. 2002년에 그냥 지나친 게 후회스러웠거든요. 저희 노래 중 제일 신나는 곡도 ‘월드컵 송’이지요. 응원가니까 따라 부르기도 쉽고.
예전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활동에 제약이 있다 보니 살이 막 쪄요. 사고 직후보다 한 10kg 쪘어요. 그래도 대한민국 장애인 중에 나만큼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옛날엔 몰랐던 것들을 알기 위해 많이 다니거든요. 장애인 친구들 찾아다니고 만나고. 그래도 그 친구들이랑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워요. 서로 도움도 주고 같이 운동도 하고, 귀저기에 설사한 얘기 같은 것도 하면서. 처음엔 휠체어 탄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았어요. 나와 같은 족속이구나 해서.
재활전문병원 건립을 추진하는 ‘푸르메재단’의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지요?

 

사고를 당하고 중환자실에 실려 가니 시체 취급이더군요. 인간적인 수치심을 느낄 정도였어요. 거기선 열에 여덟이 죽어 나가니 사람에 대해 무뎌질 만도 했던 거죠. 아무리 그래도 의사나 간호사가 조금만 더 매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로 그런 세심한 인간적 배려가 있는 재활전문병원을 세운다고 하여 ‘푸르메재단’의 활동에 참여하게 됐어요.
얼마 전엔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구족화가이자 사진가인 앨리슨 래퍼와도 만났습니다. 어떤 점이 가장 인상 깊었나요?
첫인상이요. 빨간 립스틱에 빨간 드레스를 입고 발톱엔 빨간 매니큐어를 발랐는데, 굉장히 꾸몄구나 생각했어요. 장애 극복 같은 건 얘기 않고 그림에 관해 많이 물었어요. 그도 저의 가수 활동에 관해 많은 질문을 했고요. 통역 말이, 앨리슨 래퍼가 저랑 얘기하며 탄력 받은 것 같다고 그래요.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장애 얘기만 하는 따분한 사람들만 실컷 만났으니까. 그가 그림 실력이 있는지, 사진은 잘 찍는지는 관심이 없고, 팔다리 없는 여자가 애를 낳아 잘 키운다더라, 온통 그 얘기뿐이잖아요. 아이는 그 혼자 키운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사회가 키운 것이죠. 그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위해 사회에 요구하고 쟁취해야 한다며 저를 꾸중도 하고 그랬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못 누리는 것에 하도 익숙해져놔서.
장애 판정을 받은 후 ‘부정, 분노, 절망, 수용’의 과정을 경험했다고 들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인생행로가 크게 어긋나게 되었을 때, 그 분노감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극복 못 했어요. 그냥 지쳐서 포기한 것에 가깝지요.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저는 흉추를 다쳐서 다리를 못 쓸 뿐 아니라 허리에도 힘이 없거든요. 지금도 이렇게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 있잖아요. 한참 ‘분노’ 단계에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그런 제 등을 막 때리면서 막무가내로 사인을 해달라며 종이를 스무 장씩이나 들이민 적이 있어요. 막 화를 내면서 거절했지요. 그랬더니 “무슨 연예인이 이렇게 버릇이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되지”라는 거예요. 그땐 참 화도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죠. 그런데 지나고 돌이켜보니 그냥 사인해줄 걸,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중에 다른 아주머니가 사인을 부탁했을 땐 웃으면서 해드렸더니 “힘들 텐데 참 고마워요” 하시더군요. 모든 건 이처럼 종이 한 장 차이인데 말이죠.
비장애인들 중에선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가 많습니다.
하긴 언제 그런 걸 배운 적이 있어야죠.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같이 공부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장애인과 어울릴 기회가 있어야 알 수 있을 텐데. 무엇보다 나를 불쌍하게 여길 때 제일 기분이 나쁘죠. 또 지나치게 이해하는 척하는 것도 좀 그렇고요. 하여간 뭐든 오버하는 건 나빠요. 한때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니까요. 반드시 다시 걷게 될 거라며 절 막 때리고 울면서 기도하기에 “저기요, 저는 평생 못 걷거든요”라고 말씀드린 적도 있어요. 또 “언제쯤이면 나으세요? 빨리 나아서 걸으세요” 그러는 분도 많은데 환자와 장애인은 다르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장애인뿐 아니라 어떤 사람을 대하든 이기심으로 대한 건 아닐까 한 번쯤 돌아보면 좋겠죠.
갑작스런 사고가 자신을 변하게 했나요?
더 부지런해졌어요. 공연장에도 일부러 더 일찍 가고. 이런 것도 어쩌면 콤플렉스 때문이겠죠? 그리고 좀더 긍정적으로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아, 바뀐 건 아니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아무래도 예전보다 말과 행동도 조심하고 있어요. 나름 책임감에 매어 살고 있는 거죠. 연예인이고 장애인이니까. 그러다가도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다 문득 불만이 치밀 때가 있어요. 생각해보니 그건 누구나 겪는 일이겠네요. 그런데도 그런 불만을 전부 장애 탓으로 돌리면 더 힘들어지겠죠. 송이아내 김송랑 장애 때문에 싸운 것은 시험관 아기 시술이 실패했을 때 딱 한 번이에요. 나머지는 주로 먹는 것 때문에 싸우죠. 저는 설사를 하면 안 되거든요. 송이 잔소리 덕분인지 8개월간 설사를 한 번도 안 했어요.
휠체어를 타고 역동적인 춤을 추는 ‘휠체어 댄스’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성공적으로 컴백했습니다. 가수로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솔직히 가수로서의 재능은 없어요. 저는 안무가나 연출가로서 재능이 있지요. 그간 다른 유명 댄스 가수들의 안무나 스타일도 많이 연출해주었죠. 그러니까 저는 가요계의 주 요리는 될 수 없어요. 단무지나 멸치쯤 되려나. 하지만 여름만 되면 생각나는 가수, 그거면 족하지요. 그리고 ‘쿵따리 샤바라’는 누가 뭐래도 우리가 제일 잘 부를 수 있잖아요. 노래 못하는 걸 너무 자신 있게 말한다고요? 말하지 못할 것도 없죠. 대신 댄서로서의 자부심이 있으니까. 제 꿈은 언젠가 장애인과 소외계층을 위한 공연단을 만드는 거예요. ‘바퀴 달린 남자’로 유명한 친구 박대운이 제게 그랬지요. 신이 너에게 장애를 준 건 너를 힘들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라는 뜻이라고. 그렇다면 제가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는 셈인가요?